창조론과 진화론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기독교인의 비율이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각 가정, 특히 학교에 다니는 어린 자녀를 둔 가정에서는 아마도 창조와 진화에 대해서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을 것이다. 대학생들과의 대화에서도 그런 점들이 보였으니, 그보다 더 어린 자녀들은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배우고 교회나 가정에서는 창조론을 배우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울 것이다. 2019년에 퓨리서치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을 때에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6일 창조론을 믿는 사람의 비율이 2005년보다 현저히 줄어들었고 유신론적 진화론(또는 줄여서 유신진화론)의 비율이 많이 늘었으며, 무신론적 진화론의 비율은 조금 늘었다고 한다 (42% : 18% : 26% => 18% : 48% : 33%).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을 자신의 신앙 안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로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적 창조론이라고도 하며, 현재의 모든 생명체는 진화를 통해서 생겨났는데 창조주가 창조 시에 자연계의 생명체들에게 진화의 능력을 부여했고 또 때론 진화의 과정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이론이고, 무신론적 진화론은 모든 생명체들은 우연과 자연 선택의 과정을 통해서 진화하여 저절로 현재의 모든 생명체가 생겨났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도는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며, 또는 어떻게 다른 생각을 가진 동료 성도나 무신론자와 대화해야 하는지 참으로 고민해야 한다. 진화론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무조건 무신론자인 경우가 이제는 그렇게 많지 않고,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매우 다양한 생각의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맨 왼쪽에는 철저한 무신론적 진화론이 있고 맨 오른쪽에는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6일 창조론이 있다. 우리 모두는 이 스펙트럼의 어느 한 지점에 위치해 있다.
철저하게 무신론자로서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제외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순수하게 과학적 의미로서 진화론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존재 유무는 불가지론이나 이신론적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진화의 방식을 사용하셔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단순한 기독교”라는 책으로 유명한 C. S. 루이스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었지만, 아담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았다고 믿었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반 틸은 유신진화론을 지지했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창조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창조의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성경은 과학책도 아니고 역사책도 아니다. 다만 인간의 구원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세상에 대한 과학적인 내용과 역사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적인 내용이라고 해서 조선왕조실록처럼 기록된 것이 아니고, 구원의 과정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발생했었다는 기록에 역사적 내용이 포함된 것이다. 과학적인 내용도 마찬가지다. 어떤 과학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정황 가운데 과학과 관련된 내용이 – 예를 들어, 지구가 공간에 떠 있다든지,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든지, 또는 원의 둘레는 지름의 세 배가 조금 넘는다든지 하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해서 과학 이론이나 역사적 사실을 백 퍼센트 다 도출해 내서는 안 된다. 특별히 역사적 내용에 대해서는 창세기 12장 이전의 기록들은 굉장히 함축적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역사적 기록이라고 간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또한 창세기 12장 이후의 기록들에 대해서도 서술적 기록뿐만 아니라 비유적 기록도 많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의 방식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몇 가지 체크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아담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둘째는, 아담의 타락 사건과 죄로 인한 죽음의 시작이 실제로 발생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창조 시의 아담의 상태가 미개하고 저능한 상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외의 다양한 요점들은 상당히 큰 유동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지구의 나이가 45억년인지 아니면 6천년인지 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온 우주를 6일 동안에 창조하셨는지 아니면 아주 긴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진화의 방식을 사용하셨는지 하는 것들이다.
일부 열성적인 기독교인들은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쳐서는 안 되고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교과서를 수정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면 다른 기독교인은 이 주장에 동조해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일반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무신론자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한 틀이기 때문에 그들은 무조건 그 방향으로 갈 것이고 사람들을 그렇게 교육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은 그들과 함께 배우며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들이 창조론을 배워서 우리와 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차라리 진화론을 배워서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교회와 가정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면 된다. 교회의 사역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전문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독교인 전문가를 초청해서 배우면 된다.
요점은 이것이다. 기독교인이 진화론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학교에서 진화론만을 가르친다고 해서 심각하게 염려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 중에서 유신론적 진화론을 수용한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해서 6일 창조론을 버릴 필요도 없다. 진화론의 일부분을 수용하면서도 성경 말씀대로의 타락과 구원을 믿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기독교인이며 우리 모두 다 동료이며 형제이다. 나는 문자적인 6일 창조론을 믿는 기독교인인데 저 사람은 유신진화론을 믿는 기독교인이므로 저 사람과 상종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틀린 생각이다.
더군다나 전통적인 창조론 안에도 매우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젊은 지구론을 믿으면서도 지구 나이가 6천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최소한 수 만년 정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단일격변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다중격변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고고학적 발견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날-시대 이론을 믿는 사람도 있고 간극 이론을 따르는 사람도 있어서 문자적인 6일 창조가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아담이 창조되었다고 믿기도 한다. 그러므로 창조 자체가 아니라 창조의 방식에 대한 이견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서로 반목하고 분열될 필요는 없다.
창조의 방식에 있어서 아담이란 존재에 대한 정의와 아담의 역사성과 아담의 타락 및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를 성경에 맞게 설명하면서 고고학적 발견들을 함께 설명할 수 있다면 어떤 창조의 방식이든, 심지어 유신진화론이든, 우리는 열린 자세로 대해야 한다. 신앙적 또는 신학적 접근이 아니라 목회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나 기독교인 가정에서 그리고 기독교 계열의 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칠 때에도 다양한 관점에서의 창조론을 가르치며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며 자신들의 신앙 안에서 창조론을 형성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 마치 어느 한 견해만이 성경적이고 나머지 견해들은 비성경적이거나 무신론적 진화론처럼 취급함으로써 아이들이 경직된 양자택일을 강요당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
최근에는, 퓨리서치의 설문조사 결과처럼,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진화론과 창조론을 조화롭게 결합하려는 시도들이 많아졌다. 아마도 이것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서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에 더욱 많이 접하기 때문이며 인터넷이나 유튜브에도 그러한 내용들이 많이 올라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시도이든 중요한 것은 과연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는 것이지만, 성경이 설명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여유를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창조론을 대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창조냐 진화냐 하는 오랜 논쟁 가운데서 우리가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과학이 얼마나 형이상학적 의미로 확대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자연 법칙을 이해하기 위한 과학이 아니라 과학이 오히려 창조주를 제거해 버리는 방향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 명백해졌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을 창조주 안에서 정의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며, 이렇게 정의된 과학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할지라도 열린 마음으로 서로 비평하며 서로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 내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며 형제를 사랑하고, 또한 기독교인 모두가 단합해서 무신론적 진화론에는 단호하게 대처하는 지혜를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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