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無名)으로 사는 삶 2
(이 글을 읽기 전에 앞의 글을 먼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세상의 가치 기준과 평가 체계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복음서들에서 여러 번 확인할 수 있다. 사탄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 나타나고 예수님의 형제들과의 대화에서도 나타나며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말씀 중에서,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세상에서 무명으로 사는 사람을 의미하며,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도 내어주고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덧옷까지도 내어주라는 말씀도 그렇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기적의 능력을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시고 정작 본인을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비참하게 죽는 길을 택하셨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삶은 세상의 가치 기준과 평가 체계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겨서 군림함으로써 가치를 증명하며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 알려지고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서 더 넓은 영향력을 끼치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주고 섬기며 경쟁을 피하고 경쟁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무명이 될지라도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능력이나 지식이나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큰 능력과 지식과 지혜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과 지식과 지혜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여 그들을 섬겨서 세워주고 사랑하며 스스로는 무명이 되고 고난을 짊어지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크리스찬이 고난을 짊어지는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몸을 학대하거나 자기자신을 무시하거나 또는 핍박을 자초하여 뭔가를 드러내고 달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찬은 나누어 주는데도 멸시받고 섬기는데도 비난받음으로써 고난을 짊어진다는 것이며,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기에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거부당하는 고난을 감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정복하고 지배하며 군림함으로써 자기를 키우고 크게 만들어 가치를 높여가지만, 크리스찬은 내어주고 나누며 섬김으로써 자기를 낮추고 무명이 됨으로써 오히려 세상을 꾸짖고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이웃을 섬기지만 오히려 비난받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이미 그러한 것들을 보여주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에 이것을 기록하였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8b~10). 이 역설적인 삶을 진심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을 깊이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사도가 말한 것처럼 될 수 있는 이유는, 즉 우리가 고난을 짊어지는 자유를 누리는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이루었기에 그것을 이웃과 나누며 그것으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하기에 나누어줄 수 있고 넘치기에 퍼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어떤 사람들도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그들과 다른 점은, 그들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고난을 짊어지지만 우리는 이미 이루었기 때문에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다.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 뭔가 엄청난 선행을 하거나 목숨을 걸고 핍박을 받는 그런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진 것이 별로 없을지라도 더 어려운 사람의 위치에 함께 있어 주는 것도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요, 그 사람의 짐을 나누어 지는 것도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며,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도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다. 어떠한 방식일지라도 내 형편과 상황에 맞게 그 사람을 형제로 이웃으로 함께 하는 것이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다. 목마른 자에게 물 한 잔 주는 것, 헐벗은 사람에게 옷 한 벌 주는 것,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세금을 정직하게 내는 것, 고아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돈과 생활필수품을 기부하는 것, 신입사원에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것, 길을 몰라 헤매는 사람을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는 것 등등, 모두 다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통해 뭔가를 이루고자 함이 아니라, 이미 이루었기에 이러한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바로 고난을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어렸을 적 일화가 생각난다. 교회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요한복음과 요나서에 대해 성경퀴즈 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두드러지게 뛰어났다. 그는 담당 전도사가 퀴즈 문제를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손을 들고 정답을 맞추었다. 예배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교역자들이 다 감탄하며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고 알게 된 것은 그 친구가 평소 친분이 있던 다른 교회의 전도사에게 성경퀴즈 예상 문제집을 미리 받아서 그것을 공부하였다는 것이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그는 영리하게 잘 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칭찬과 1등 상품은 그 친구에게 어떤 선한 영향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문제도 맞추지 못했을지라도 요한복음을 한 장이라도 직접 읽어본 아이가 차라리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한참 세월이 지나서 나중에야 들었다.
우리 크리스찬이 이 세상에서 무명으로 살며 고난을 짊어지는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으로부터 그리고 주변으로부터의 유혹을 끊임없이 물리치고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주님을 바라보며 사도들을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이 걸었던 삶의 자취를 살펴보며 오늘 하루라도 무명으로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사는 순간마다 우리 주님이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은혜를 더욱 부어주셔서 그 삶이 역설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곧 무명인 것 같으나 유명한 것이 되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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