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0. 8. 29. 05:22

영적 부족함을 절감하며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4~5)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1)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5:18)

 

주변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데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것에 대해서 소그룹 모임에서나 개인적으로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심지어 때로는 섬기기는커녕 오히려 자기의 부족함만을 절감하며 눈물로 기도하고 엎드려 간구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하나님과 동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그리스도 안에서 맺고 싶은데, 어느 정도 되는 같다가도 나의 부족함을 절감하며 하나님께 엎드려 도움을 간구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경우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는지 살펴보았고 내게 가르쳐주신 것을 함께 나누어서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어려운 시기에 더욱 힘을 내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섬기며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기본적인 열망을 가지고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 말씀을 듣거나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감동을 받고서,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고 그리스도처럼 모든 것에 순종하고자 결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결심한 만큼 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어리석고 형편없는 존재인지 절감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우리가 언제 이런 부족함을 더욱 심각하게 느끼는가 하면, 우리가 그런 결심하고서 진정으로 열심을 내는데 오히려 시험이나 시련을 겪으며 좌절하게 되면서 주로 그렇게 느낀다. 이런 결심과 열심을 하나님께서 보시고서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실것으로 기대했는데, 기대와는 다르게 시험을 받고 자꾸 넘어지거나 시련을 겪으면서 자꾸 도망치게 되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께 실망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는, 그냥 아무 없이 가만히 있을 때에는 부족함을 느낄 이유도 없고 마치 모든 일이 되고 있는 것처럼 넘어가기에 그게 차라리 좋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의 DNA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도록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해 놓았기 때문에, 잠시 어떤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져 있지 않는 , 우리 영혼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이 끊임없이 솟아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되고, 따라서 그냥 아무 없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또한 그냥 모든 일이 되고 있는 것처럼 느낄 만큼 영적 센스가 무디어질 수도 없다. 성령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우리가 열심과 실망 사이에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우리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부족함의 감정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스리고 극복할 필요가 있다.

 

먼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이런 부족함으로 빠져드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열심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진정 우리의 열심에 반응하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부족함으로 빠져드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자녀가 열심히 아버지를 본받으려고 하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자녀의 열심을 무시하고 본체만체 하겠는가. 아버지는 당연히 자녀를 인도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지혜도 주시며 자녀의 열심이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그럼 우리의 열심은 실망으로 끝나게 되고 우리의 부족함만을 절감하며 낙심하게 되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열심이 어느 순간 아버지의 인도하심에 따라 걷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열심의 시작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되었는데, 뭔가 이루어지는 같거나 또는 감동을 우리의 삶에서 실현시키고자 , 성령님의 가르침대로 이루어 나가지 않고 어느 순간 우리의 욕심과 정욕과 뜻으로 열심을 이루려 하면, 우리의 열심은 반드시 실망으로 끝나게 된다. 우리가 처음에 열심을 내고자 때에는 그러는데 막상 열심을 또는 열심이 조금 열매를 맺는 같을 ,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열심이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우리의 욕심을 혼동하게 하고 마치 우리의 욕심을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착각하게 만들어서, 결국 성령님이 아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 처음엔 뭔가 되는 같다가 나중으로 갈수록 힘들어지고 실망스럽게 변하더니 결국엔 실패하게 되고 자신의 부족함만을 절감하며 끝나는 경우인 것이다. 구약 성경에 여러 인물들이 있지만 아마도 사울왕이나 삼손이 대표적인 예가 것이다. 삼손은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받고 엄청난 힘을 갖게 되었지만 참으로 세상적인 이유로 힘을 잃어버리고 블레셋의 노예가 되었다. 신약 성경에서는 마가를 대표적인 예로 있을 것이다. 마가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선교 여행을 갔다가 도중에 포기하고 혼자서 돌아와 버렸고, 일로 인해서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상 동역하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마가는 선교 여행을 포기했을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성경에서도 성도의 삶에서도 너무도 흔한 것처럼 보인다. 사도 바울도 경고한 대로, 성령님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냐고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했던 것처럼, 시작은 성령님으로 인해 이루어졌으나 도중에 사람의 욕심대로 정욕대로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변질되어 스스로 시험에 들게 되고 결국 실패로 마치게 되는 어리석음이 우리에게는 항상 존재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죄의 습성이 남아 있는 육신을 입고 사는 존재하는 가능성이다. 그런데 시작이 성령님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것에 관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이 성령님에 의한 것이 것이라고 쉽게 착각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의 욕심은 언제든지 성령님을 밀어내고 마음을 차지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언제든지 실수와 실망의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자기 욕심으로 결국 실패하고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열심을 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대로 순종하며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데도 어려움과 시련에 부딪쳐서 좌절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성령님으로 인해 시작했고 좋은 열매도 맺고 있고, 더욱이 성령님만을 의지하며 순종하는데도 어려움을 겪게 되므로 심히 혼란스럽고 우리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순종하는 자녀에게 때로는 힘에 부치도록 시련을 허락하셔서 자녀가 이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는 경우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므로 혼자서 시련을 극복하려 하다가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으며 좌절과 실망 부족함을 절감하게 된다. 영적 성장을 이루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다 뜻을 알기 전까지는 자신의 부족함만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인 우리의 잘못을 비록 모든 잘못에 대해서는 아닐지라도 징계하시며 교정하시기 위해서 어려움을 허락하시지만, 또한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어려움을 허락하신다. 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욥은 온전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심한 고난을 받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하나님 바로 옆에서 깨닫게 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가 때때로 혹독한 고통에 참으로 괴로워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기도 하기도 하였지만 친구들의 시험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였기에 시련을 이기게 되었고 하나님 아버지와 더욱 친밀해졌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녀들의 영적 성장을 이끌어 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욥이 만일 시련 속에서 좌절하였다면 그는 참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했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를 주님께서 없애주시기를 간구했으나 주님은 은혜가 족하다고 하시며 들어주지 않으셨지만 바울은 오히려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배웠다.

 

그렇다면 어떤 어려움이 자기의 욕심에 따른 시험인지 아니면 영적 성장을 위한 시련인지 어떻게 수가 있을까.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욥의 경우처럼, 항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부딪히는 어려움은 시련인 것이고, 비록 시작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었지만  결국에는 나의 욕심과 뜻을 이루려 하다가 당하는 어려움은 시험인 것이다. 시험을 받아야만 나의 욕심이 드러나기 때문에 시험은 당연한 것이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내는데 어려움이 닥쳐서 열심은 사라지고 실망과 낙담과 부족함만이 드러나면, 자신을 살펴서 열심의 시작과 과정과 열매가 하나님 안에 있는지 아니면 어느 것이라도 욕심을 따라갔던 것인지 살펴야 한다. 그래서 만일 욕심을 따랐다면 회개하고 다시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며 나의 부족함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능력의 부족함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먼저 성령님으로 충만하기를 간구해야 한다.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에만 나는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온전히 인내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나의 영적 성장을 위한 시련이라면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기를 간구해야 한다. 소망만이 시련을 이겨낼 있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자세히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혜를 구하면 후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배워서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래서 언제 어떠한 욕심이 나를 이끌어 갔는지, 혹은 혼자 힘으로 일어서려 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만일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시험에 들어서 실패한 것이면 어떻게 나의 자아를 죽이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며 끊임없이 인내할 있는지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결코 스스로 인내를 온전히 이룰 없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또는 만일 나의 영적 성장을 위한 시련이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고 소망으로 가득 차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소망이 가득하면 인내는 쉽다.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면 쉬운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부족함을 절감했을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부족함을 혼자 힘으로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부족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부족함을 극복해서 다시 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의 진행은 부족함을 거듭 절감하게 되고 결국 열심을 포기하게 되며 한동안 무기력하게 지내도록 만든다.

 

부족함과는 반대로, 성경에는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이 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과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은 사실상 동일한 의미이다. 성령님의 열매가 사랑이며,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면 인내를 온전히 이룰 있다. 그런데 성령충만은 조금 추상적인 느낌이 든다. 이것은 성령님으로 충만한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충만을 구체적으로 있도록 표현하면 말씀충만이라 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므로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면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의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충만은 소망충만이 되고, 소망충만으로 인해 인내는 쉬워진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자신이 성령님으로 충만한지 아닌지 알고자 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지 또는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한지 살펴 보면 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우리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하고 있는 증거일 있기 때문이다. 마치 키가 크려면 음식이 고프고 당겨서 부족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다만 이때 포기하지 말고 오직 인내로 부족함을 채워야 실제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므로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실제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우리가 부족함을 절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없는 이유는 부족함을 통해서 겸손과 온유와 절제를 배우며 성령님 안에서 다음 단계를 바라볼 있기 때문이다. 삼손과 마가도 분명히 자신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내가 그때 조금 인내하지 못했을까하나님을 조금만 믿고 신뢰했다면 좋았었을 텐데…’ 하면서 자책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족함을 절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인내하며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며 오히려 성장했다. 그래서 삼손은 마지막으로 한번 기회를 얻었고, 마가는 결국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동역자가 되었고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영광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시편 23 말씀을 살펴보자.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말씀은, 주님을 나의 목자로 삼았으니 이제 내가 원하는 받으면서 마음대로 있다는 의미가 결코 절대로 아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이시므로 나는 전적으로 목자에게 순종하겠다는 의미이며, 주님은 전능하시고 사랑의 목자이시므로 주님께 순종함으로써 내게는 부족함이 있을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행여 실수하더라도 부족함으로 끝나지 않고 목자의 돌보심으로 인해, 부족함을 통해서 오히려 목자의 사랑을 배우며 더욱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순종에는 인내의 고통이 반드시 따른다. 그러한 인내의 고통 가운데 있더라도, 잃어버린 마리의 양을 찾아서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 목자처럼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결코 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의 부족한 부분까지도 살펴서 때에 맞게 채워주시고 성장하도록 이끄신다. 주님은 과연 그러하시다. 그러나 주님을 우리가 명목상의 목자로 만들고 우리의 욕심을 채우려 우리는 실패와 실망만을 맞이하게 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부족함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지 말고, 부족함을 절감할 때에 오히려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영적 성장을 기대하자.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채우고 소망 가운데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결국 열매 맺는 삶으로 나아가자.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은 이처럼 멋지고 아름답고 능력있는 삶이다. 고통이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으며 절벽과 같은 고통이 아니라, 소망 있는 고통이다. 그러니 실망과 후회와 한탄과 패배감과 원망을 버리고 주님 안에서 소망과 기대와 능력과 만족과 사랑으로 충만하자. 우리의 삶은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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