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4. 23:56
기억의 시간
이재이
누나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어서
기억을 잃는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내일을 계획하지 못한다
이십 년 전, 제왕절개수술 받을 때 사고로 인해서
아이를 낳기 전까지의 일들은 기억하지만
그후의 일들은 이십 분 동안만 기억할 수 있다
내 얼굴도 내 이름도 알지만 내 아이는 기억하지 못한다
자기 아이의 이름은 매일 아침에 입력된다
엄마를 만나러 와서는 왜 이리 주름이 늘었냐고 묻고는
엄마 보고 싶어 왔다가 돌아가신 아빠를 만나고 간다
우리집 현관문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가끔 문을 열어주지 않아 저녁마다 내 얼굴을 확인시킨다
오늘 저녁에는 나를 뒤따라오는 발자국을 받아들이지 않고 문을 닫는다
발자국을 거두지 못한 나는 하루를 기억하지 못한다
집에 들어온 것은 기억하는데 아침과 오후는 모자이크에 빠졌다
어느 정도 과거를 잊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정신과 전문의가 TV에 나와서 했던 말이 기억났다
잊을 건 잊어야지,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하는 나이든 엄마와
무슨 일이든 이십 분 동안만 슬퍼할 수 있는 누나와
현관문 앞에서 문을 열지 못해 끙끙대는 나는 기억의 식구다
누나와 다툴 일이 없어도
누나를 안아줄 기억이 없어도
식구들과 하루를 만들고 잊고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