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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0.08.02 혼자 된 나무
  5. 2020.08.02 이메일이 전송되었습니다
  6. 2020.08.02 인디언 리버(River)
  7. 2020.08.02 장마
  8. 2020.08.02 한숨
posted by 풀숨 2020. 8. 2. 09:26

묘비명



이재



평생에 대한 한 줄 평보다는

앞날에 대한 다짐

산 자를 위한 위로


누군가 여기 잠들다

그 옆에 기대어 앉은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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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 09:24

비탈길에서



이재이



거울을 피하려 땅만 보고 걷습니다

마주치는 눈이 조심스러워 바닥만 보고 걷습니다

바람에 침이 섞여 있는 시간

나무들이 쏟아져 내리는 시간

바닥을 향해 산처럼 걷습니다

걷다가 걷다가, 마치 세상이 투명하게 변한,

그림자 놓치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바닥에 도착한 것이겠지요

그림자도 비탈을 피해

산 뒤편으로 숨어든 것이겠지요

그대도 걷다 보니, 꿈쩍 않는 바닥에서,

흑백 필름처럼

입김 조각 조각, 발끝에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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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 09:23

사막



이재



냄새부터 다르다

멈추는 것을 잊어버린 바퀴처럼

나의 의지는 호흡마다 증발해 버렸고 이제

걷는 것은 의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막에서 아름다운 것은

밤의 별자리뿐

그것이 나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별자리의 행복은

모래 구덩이에서 누리는 짧은 꿈


사방이 질식뿐이다

사방이 입구뿐이다


마른 뼈들의 수고

아무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땅에서 별을 발견했어도 영원히 그곳에

살 수 없는 오아시스

오늘도 하얀 나무를 등에 지고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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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 09:20

혼자 된 나무



이재



고개 숙인 걸음에

나뭇잎 하나 떨어져

손 닿을 거리보다 조금 먼,


처져서 기운 어깨

나무의 몸짓에 빗물 떨어져

떨림이 된,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잎이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씻긴 나뭇잎을 손바닥에 놓으니


푸드득 까마귀 날아간다


얼굴을 타고

하얀 나뭇잎에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 그리고

손바닥에 뿌린 내린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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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 09:18

이메일이 전송되었습니다



이재이



내게 묻는 것인지

내가 묻기를 기다리는 것인지 이메일 창 화면에

너는 깜박거리는 몸짓으로 서 있다


잘 지내지?


너는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이야기를 기다리며 하얀 숨을 내쉰다


건강하고 별일 없지?


멀리 있는 너에게 먼저 물어야 하는 말들

그래도 너는 듣고 싶은 말을 들을 때까지 잠잠히

마른 맥박으로 졸라댄다


잘 있어

보고 싶어


그제서야 너는 화면 너머 이름으로 남고

내일 조그만 풍선을 들고 내게 달려올 것이다

띵동 소리를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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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 09:16

인디언 리버(River)



이재이



델라웨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인디언 리버, 바다를 만나는 바닥엔 돌이 많고 물살이 빨라

낚시하기가 까다롭지만 팔뚝 만한

블루피쉬가 쏠쏠하게 올라와서 주말이면 캠핑장까지

사람들로 북적댄다 아버지는 이곳을 좋아했다

소수민족의 동질감이 스미는 이름 속에

50 킬로 몸으로 하루의 노동을 쉬고


여기 낚시는 어종별로 크기 제한이 있어서

놓아줄 때면 아버지는, 아깝다 더 커서 와라, 했고

허탕치기 일쑤지만 쪼그려 앉아 기다린 끝에

드디어 팔뚝 만한 게 올라오면

식구들을 불러모아 크기를 재보라며

내가 잡는다고 했지! 오늘 저녁은 매운탕이다, 큰소리쳤던

언젠가는 홍어를 두엇 잡아 식구들이 삭혀서 먹자던


아버지는 이제 인디언의 이름 옆에 누웠고

내 낚시줄은 자꾸만 돌에 끼고 끊어져 아버지에게 간다

자유로운 방랑의

머리에 독수리 깃털을 단

물길은 그대로다

오래전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던 시절

인디언 리버라 불리우게 된 역사

보호구역은 없어지고 마른 꿈 물그림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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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 09:12

장마



이재



처마 끝 툇마루에 쪼그려 앉아

장마 한 자락

어둠처럼 떨어지는 빗방울에

석상같은 손 내밀어 담으며


막배 끊긴 섬처럼

행여조차 바랄 수 없는

장승이 된다


숨 닫힌 대문 너머 가로등

불빛은 비에 안겨 눈물로 부서지고

저 멀리 개짖는 소리는 바람에 씻겨

울음으로 흐른다


남겨진 자는 종일 대문을 바라보고

떠난 자는 발자국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래도 이 밤

닿을 수만 있다면

한 줌 남지 않고 흘러내려도

내민 손끝에 스치기라도 했으면


툇마루 삐걱이는 소리가

나를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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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 09:10

한숨



이재이



잠들지 않는 밤은

찻길 건너는 노란 달팽이


원통 위에서 구르는

한 문장 한 단어를 현미경으로 해부해도

치료할 수 없는 수술실


식어버린 국화차

입에 머금다 결심한듯 삼키지만

다시 찻잔에 따르게 되는


밤은 비틀거려도 넘어지지 않는

술취한 아버지 같은


밤은 헝클어진 검은 커튼

커튼에 새겨진 희미한 문양은 선물


잠들지 않는 밤은

커튼 건너는 노란 달팽이

껍질을 갖지 못한 민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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