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0. 8. 2. 09:06

저지르다



이재이



숨소리를 기억할 수 없는 꿈을 꾼다

제단 위에 놓인 창조의 책을 찾지 못하고

이리 뒤지고 저리 뒤적이다

언어를 잃어 기도하지 못하고

아무나 불러보는데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가시나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아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밖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선듯 나서지 못하는 사이 내가 밉다


아비의 아비의 아비는

사과 하나에 팔렸고 거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자식들은 사과 하나 이상의 것에 팔리며

적어도 아비 보기에 창피하지는 않지만

사과 하나가 안 되는 것에

팔린 날도 있었다


그날, 나는 사랑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을 해도 될 것 같은 순간

스스로 머리 위에 숯불을 놓지 않으면

가시덤불로 들어가지 않으면

쓰레기도 안 되는 것에 팔린 채

사랑은 비명이 된다


수선화처럼

활짝 핀 얼굴 안에 부끄러운 얼굴 담고

들풀의 이름으로

아비의 아비의 아비에게

창조의 책을 건네기 위해

흙밭에서 움트고 싶다


죽음의 책만 비명으로 펄럭이는

황무지에서

맨몸으로 심겨야 씨앗이 된다는 것을

땅은 처음부터 알고

부르튼 입술, 신음으로

배수구 같은 갈증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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