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위로'에 해당되는 글 77건

  1. 2021.06.26 하나님의 위로
  2. 2021.06.13 겨자씨 비유
  3. 2021.05.29 씨 뿌리는 비유 1
  4. 2021.05.22 디오드레베를 조심하라
  5. 2021.05.15 가장 가치 있는 삶
  6. 2021.05.01 더 큰 하나
  7. 2021.04.24 쉬운 기독교, 어려운 기독교
  8. 2021.04.17 시험하시는 하나님
posted by 풀숨 2021. 6. 26. 23:12

하나님의 위로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서 40:1)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서 41:10)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온 세상은 고통과 슬픔의 시기를 겪고 있다. 백신이 어느 정도 잘 작용하고 있어서 팬데믹 종식에 대한 희망이 보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변이가 자꾸 나타나서 백신을 무력화시키고 다시 어려운 상황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지금까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이 죽었고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 그렇게 될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살 것인가?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고아처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요 14:18).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어떠한 위로를 주시는 것일까?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00년 경에 유다 왕국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였다. 그의 행적과 그가 대언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사야서를 살펴보면, 39 장까지는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및 주변 나라들의 범죄 사실들과 그에 대한 심판이 주요 내용인데, 40 장부터는 마치 전혀 다른 기록처럼 보일 만큼 희망찬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회복과 구원에 대한 약속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이어지는 원대한 계획을 선포하신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이사야서를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이 저작한 것을 편집해서 하나의 책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도 주관하시는 분이시므로 한 사람에게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모두 가르쳐 주실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는 40 장부터 마지막 장인 66 장까지의 내용으로 인해서 성경 안에서도 너무도 독특한 책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범죄로 인해서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위로와 약속이 너무도 원대하고 희망차게 그려져 있다.

 

이처럼 성경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잘못함으로써 고난과 환난을 겪어야 하는 경우에도 그들을 그냥 모른체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로하셨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이사야서 41:10 말씀이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포함한 주변 나라들을 향한 심판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과 위로를 선포하는 시작점에 이 구절이 나타나고, 계속 이어서 궁극적으로는 고난받는 종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될 백성들과 그들이 마침내 누리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선포가 기록되어 있다. 전환의 시작인 이사야서 40장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어둡고 슬프고 두려운 심판에 대한 말씀들 이후 갑자기 등장한 말씀이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제 노역의 때가 지났고 죄들이 사면을 받았으므로 고통은 지나갔으니 위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로하는 근거는 하나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때에 맞게 성취되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기에 이사야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 역시 역사적으로 반드시 성취될 것이므로 이것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고 새 소망 가운데 지치거나 낙심하지 말고 견디어 보자.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우리가 눈으로는 전혀 알 수 없을지라도 믿음으로는 알 수 있으므로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서 힘을 내보자.

 

어쩌면 코로나 팬데믹은 하나님이 세상에게 주시는 마지막 경고일 수도 있다. 이전까지는 아무리 규모가 커도 전 지구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으나 이번 팬데믹은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존 밀림에서도 코로나 감염자가 발생할 정도로 전 지구적인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유럽의 흑사병도 심지어 세계 대전도 완전히 전 지구적이지는 않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은 지구 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위협적이다. 어느 누구도 코로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매일마다 죽음을 뉴스로 들어야만 하고 심지어 이웃의 죽음을 눈으로 봐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사람으로부터 왔다. 코로나 팬데믹이 초래된 것도 사람의 어리석음 때문이며 사람의 욕심과 정욕 때문이다. 우리는 어리석다. 우리는 불완전하다. 우리는 눈만 높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낱 인생일 뿐이다. 그래서 이 모든 사태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리석음을 원망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어리석음은 바로 여기에도 작용을 하여 우리의 어리석음이 아닌 하나님을 원망하게 한다.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을 만큼 총체적인 어리석음인 것이다. 거기에다가 사탄이 사람들을 살살 꾀어서 더욱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고 사람들은 거기에 함몰되어 하나님을 거부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크리스찬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사야서에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위로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리고 우리의 상황을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생기고 그래야 인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나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위로하며 사람들이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으로 인해서 우리는 일어나 빛을 발할 수 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사야서 60:1~3)

 

이사야서에 기록된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성취되었음을 우리는 역사적 사실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직 성취되지 않고 남아있는 약속까지도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깨닫고 위로를 얻어야 한다. 사방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겨쌈을 당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깨닫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고 우리도 그 역사하심에 부응하는 삶을 누려야 한다.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울수록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발견하고 바로 그것에 우리의 소망을 두며 흔들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넘어서 영원한 세상에서의 영원한 삶으로 이어질 때까지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를 자신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굳세게 붙들어주실 것이다. 어떠한 상황과 환경과 조건과 사태가 발생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기에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가 증명해 온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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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6. 13. 22:37

겨자씨 비유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막 4:30~3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 비유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아주 간단한 비유 같지만 생각해 볼 것이 많은 비유이고 그래서 중요한 비유이기에 공관복음서들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이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확장되어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2000 년 전에 나사렛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아주 작았던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님에 의해 성도들을 따라서 세상으로 전파되고 점점 커져서 온 세상에 복음이 선포되고 교회가 세워지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해석과 설명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에 의해 이 땅에 심어진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 지리적으로 양적으로 그리고 세상 각계각층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지난 2000 년 동안 성장해 왔다. 사탄 마귀의 온갖 박해와 훼방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승리의 깃발을 올리며 수많은 국가들에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유에서 깊이의 성장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에베소서 3장 16~19절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한 기도이다.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은 단편적이거나 일률적이지 않으시므로 모든 일에 다양한 차원으로 일하신다. 그분의 사랑과 능력 역시 그렇다.

 

하나님의 이러한 입체적이고 다양한 차원의 역사하심을 겨자씨 비유에 적용해서 생각해 보면, 겨자씨 하나가 자라서 큰 나무처럼 커지고 거기에 새들이 깃들일 만큼 커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하게 지리적이거나 수(數)나 양(量)적인 영역에서만 성장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깊이 또한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리적으로 확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의 믿음의 깊이가 더욱 성장하여 교회의 공의와 사랑과 생명과 기쁨이 깊어지고 자라서 이웃을 포용하여 그들이 교회에 깃들일 수 있을 만큼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겨자씨 비유의 말씀을 대부분 단편적인 의미로만 해석해 왔다. 그래서 교회들이 전도와 선교에 열심을 내는 좋은 열매를 얻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영적 성장을 등한시하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 비유의 말씀을 하나님의 성품에 맞게 입체적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단순히 하나님의 나라의 지리적인 또는 양적인 확장만을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교회와 성도 각자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이해하면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과 삶으로 증언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너비와 깊이와 높이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겨자씨의 크기였지만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과 양육하심으로 인해서 점점 성장하여 나중에는 큰 나무처럼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는 크기가 된다. 이웃을 안아주는 멋진 삶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 주님을 닮아서 이웃들이 언제라도 깃들일 수 있도록 넉넉한 마음까지 성장하는 것이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교회는 큰 나무처럼 이웃이 쉴 수 있는 그늘이 되고 사람들이 깃들일 수 있는 넉넉함을 제공하는 수준까지 성장해야 한다. 단지 교회의 예배당 건물을 크게 짓고 수(數)적인 성장만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인 성장이 먼저 고려되고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교회 전체가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교회라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아래 성장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하는 것은 성도 개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도 그래야 한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아주 조그맣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성도의 마음이나 교회나 지역 사회나 어느 민족에서든 아주 작은 상태로 머무르지 않고 점점 자라서 이웃을 품어주고 세상을 품어주는 크기까지 자라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통일되는 그날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한 길에 서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너비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점점 자라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멋있게 이웃에게 보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하나님의 나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각 개인으로도 하나님의 나라요, 집합적으로도 하나님의 나라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통치되는 멋지고 아름답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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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5. 29. 05:12

씨 뿌리는 비유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씨 뿌리는 비유는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교훈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묘사하신 것이다. 이 비유에는 4 종류의 밭이 나온다: 길 가, 돌밭,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땅. 그래서 씨가 길 가에 떨어지면 미처 땅에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새들이 와서 씨를 먹어버리고, 또 씨가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면 싹은 나오나 흙이 깊지 않기 때문에 금방 말라 버리며, 또 씨가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면 싹이 나고 뿌리도 생기지만 가시가 자라서 싹이 자라지 못하도록 막아 결국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며, 마지막으로 씨가 좋은 땅에 떨어지면 뿌리도 깊게 나고 싹도 잘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육십 배, 또는 삼십 배의 결실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게 하신다는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이 비유를 풀어서 설명해 주시며, 밭은 곧 사람의 마음을 그리고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땅에 심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비유를 이해하기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좋은 밭이 되어야 하므로 사람은 좋은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끔 항상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이 비유가 사람의 노력을 그렇게 권면하기 위해서 주어졌는가 먼저 살펴 봐야 한다. 이 비유는 그러한 의미가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만약에 좋은 밭을 만들기 위한 사람의 노력이 중요한 것이라면 그 당시에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했던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은 좋은 땅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열매를 맺었어야 했는데,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비유의 핵심 요점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인간의 자연적 상태에서 좋은 땅은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현실은 너무도 비참하다는 것이다. 거듭나지 못하고 자연적 상태에서는, 모든 사람은 다 치우쳐 자기 보기에 좋은 길로 갔고, 의인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고,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영이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서 그 상태로 있기 때문에,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앙망하고 바라며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님께 올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잘해야 돌밭 내지는 가시떨기밭일 뿐이다. 사람이 아무리 의롭다 해도 더러운 누더기 같을 뿐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었다.

 

사람이 거듭나지 못하고 자연적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패러독스의 방법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 자체가 엄청난 패러독스이다. 사람이 노력해서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한낱 피조물인 사람을 사랑해서 자녀로 삼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시고 또한 심지어 사람처럼 죽기까지 하셨다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노력해서 하늘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것인데, 하나님은 거꾸로 하나님이 친히 내려가겠다고 하신 것과 같은 패러독스이다. 또한 사람의 생각으로는 잘해야 ‘죽기를 각오하면 살 길이 열린다’ 정도가 전부인데, ‘실제로 죽어서 살게 되었다’는 패러독스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사람의 생각과 이해로는 하나님의 패러독스의 깊이를 결코 넘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자기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여 결정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고, 자기 생각에 그러한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일 수 없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마냥 돌밭인 사람의 마음인데, 그 마음이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하심으로 인해서 부드럽고 좋은 밭이 되어 씨앗을 품고 싹을 틔워 자라서 열매 맺는 땅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방법 밖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들어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혈통이 좋거나 또는 스스로 준비하고 노력해서 자기 마음을 좋은 밭으로 만들어서 씨앗을 받아들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죽은 땅은 죽은 땅일 뿐이지 스스로 노력한다고 살아나서 좋은 땅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 완전히 수동적이며 사람은 그저 로봇에 불과하다는 의미 또한 아니다.  사람이 자연적 상태에서는 결코 좋은 땅이 될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좋은 땅으로 살아나서는 그 좋은 땅을 어떻게 유지하고 씨앗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기까지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는가 하는 것은 사람에게도 달려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역사하시지만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에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이 말이 하나님과 사람이 합력 또는 합작해서 뭔가를 이루어낸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이 실행한 결과와 하나님이 실행하신 결과를 합하여 어떤 최종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50% 하시고 사람이 50% 해서 합하여 100%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좋은 땅으로 변하게 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에 순종하여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만 사람의 순종을 강조하기 위해서 마치 사람의 순종으로 인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으시기에 사람이 순종하기만 하면, 즉 좋은 땅을 유지하기만 하면 씨앗은 반드시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은 사람의 순종을 무척이나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심지어 사람이 좋은 땅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어린 자녀를 가르치고 양육하듯이 하나 하나 가르치시며 인도하셔서 결국에는 순종하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려야 한다. 우리가 좋은 땅이었기에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게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태가 어떠했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순전히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좋은 땅으로 만들어 주셨고 열매 맺을 있도록 불철주야 노심초사 양육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심지어 그 열매 맺음을 우리가 잘 했기에 열매 맺을 수 있었던 것처럼 인정해 주시고 더욱 큰 은혜를 부어주신다. 사람은 자기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찾게 되고 바라게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임을 깊이 생각하며 언제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우리의 육적인 자아가 방해하고 사탄이 유혹하며 훼방을 놓을지라도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굳건히 견디어야 한다.

 

우리는 좋은 땅이 되었음에 대한 감사가 항상 우리 입술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그리고 은혜로 받은 그 좋은 땅을 놀리지 말고 항상 사용하며 열매 맺기 위해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 배울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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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5. 22. 21:08

디오드레베를 조심하라

 

사도들이 직접 사역하던 시대에도 교회 안에는 다양한 문제들이 있었고, 또 교회들 중에서 각각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교회도 있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되고 있는 과정에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처럼 전체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므로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었고 따라서  더욱 그러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서 발생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들도 있었는데, 요한3서에 기록된 디오드레베가 일으킨 문제가 그중에 하나다.

 

사도 요한이 디오드레베에 대해 묘사한 내용을 보면, 그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고 사도와 그 일행을 맞아들이지 아니하며 오히려 악한 말로 사도의 일행을 비방하고, 사도를 맞아들이고자 하는 교인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요한3서에  딱 한 번 등장하는 인물이라서 그에 대해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는 그 당시 집사의 직분 – 오늘날로 따지면 담임 목사보다는 장로 직분을 받았었던 것 같고, 아마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계급이 있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또는 말재주가 좋아서 사람들을 잘 설득하는 재능을 가졌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때가 대강 주후 90년 정도였고 사도 요한이 아직 밧모섬에 유배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처럼, 사도들을 포함한 복음전도자들이 여러 지방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하여 세우고 나서 그 교회가 영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감독/장로/목사를 세워서 교회를 맡기고 다시 다른 지역으로 전도 여행을 갔다. 복음전도자는 혼자서 다닌 것이 아니라 몇 명이 팀을 이루어 다녔으며 그들은 한 지역에서 몇 개월 또는 몇 년을 살면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 기간 동안에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며 먹을 것과 지낼 곳 등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디오드레베가 교인들을 선동해서 사도와 그 일행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복음 전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기록된 성경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못하고 영적인 선생님이 없는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되는 교회가 아니라 디오드레베의 사조직이 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와 똑 같은 일이 어느 교회서나 흔하게 발생할 수 있다. 카리스마 있고 공명심이 큰 목사나 장로가 이끄는 교회에는 이러한 일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또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목사의 사조직으로 삼는 일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를 정치단체로 조직화 해서 복음이 아니라 정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목사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목사를 직접 보지 않았던가! 또 예수 그리스도보다 목사가 더 높아져서 복음이 아니라 목사의 주장에 목숨 걸고 따르는 사람들도 직접 보지 않았던가!

 

교회의 목사, 장로, 권사, 또는 안수집사와 같이 지도자가 되면 필연적으로 한 가지 유혹이 따른다. 공명심(功名心)이다. 명예를 향한 탐욕이 생겨서 어떡하든 공을 세워 자기 이름을 널리 드러내 영향력을 키우고자 하는 욕심에 따른 행동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수십, 수백, 심지어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목사님, 장로님 하면서 떠받들어 주는 것 같고 어느 장소에서든 중심이 되는 것 같고 또 자기 없으면 일이 안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면서 오직 자기만 뭐든 잘 할 수 있는 것 같고 자기가 하면 뭐든 잘 될 것 같고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가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이제 모두가 자기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도취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부패한 심령이 갖는 자연스러운 정서이다. 또는 초신자나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성도가 갖는 어리석은 마음이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라면 점차 이러한 유혹에 저항하는 힘을 갖게 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조금씩 이겨내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유혹에 더욱 함몰되고 결국에는 디오드레베처럼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장악된 교회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한낱 사조직에 불과할 뿐이다. 그 목적이 개인들의 친목에 있든지 경제적 이익이나 정치적 이익에 있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그 교회는 말만 교회일 뿐이며 교회의 탈을 쓴 사탄의 하수인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라는 탈을 쓰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방해가 되며 사람들이 교회를 오해하고 멀리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는 너무도 당연하게 복음을 무시하고 성경의 권면들을 무시하며 자기들의 눈에 좋은 것들을 무대뽀로 한다. 주변의 사람들이나 심지어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 나서서 쓴소리를 해도 절대 듣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마치 성경에 따라서 하는 것처럼 눈속임을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확실하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하게 만든다. 사탄이 좋아할 일들만 골라서 하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의 끝나고 우리가 예전처럼 다시 모이기 시작하면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들이 교회에 더욱 많이 나타날 것이다. 팬데믹으로 인해서 교회가 모이지 못하고 활동이 억제되어 억눌린 공명심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게 될 것이며, 그러면 그 폐해는 교회가 고스란히 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 모두는 사도 요한의 경고처럼 우리 교회에 그러한 사람이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보고 그러한 사람이 교회를 망가뜨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떠나도록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교회 전체가 조심해서 그러한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데, 이는 일부가 동조하기 시작하면 결국 전체가 넘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우리 주님이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 깊이 생각하고 또한 사도들이 어떻게 교회를 섬겼는지 깊이 묵상해야 한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낮추시며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섬기려 오셨고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으셨다. 주님을 본받아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고후 1:24). 그리고 또한 이렇게 가르쳤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3).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그러므로 아주 잠깐 조금만 생각해 봐도 너무도 확실하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를 성찰하며 조심해서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말고 또한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이 교회에서 교인들을 주관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가지고 유혹하더라도 그런 사람에게 동조하고 뜻을 함께 해서는 교회를 망치는 것일 뿐이다. 팬데믹이 끝나면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눈에 띄게 많아질 것이다. 경계해야 한다. 조심해야 한다. 우리 주님의 교회에서는 오직 주님만이 높임을 받아야 하고 우리 주님의 아버지가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받아야 한다. 어느 누가 어떤 말로든 유혹하면 우리 교회에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가지고 살펴보면서 교회 전체가 사조직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디오드레베가 벌인 일은 2000년 전에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지금도 어느 지역에서나 어느 교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팬데믹의 후유증으로 인해 더욱 많이 일어날 것이다. 말세지말에 성도를 어떻게 하든지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사탄의 졸개들이 양의 탈을 쓰고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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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치 있는 삶

 

어느덧 1 년이 훌쩍 넘어버린 코로나 팬데믹의 기간 동안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며 또 기대하고 있으며 팬데믹이 종식되고 난 후에는 어떠한 삶을 살게 될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팬데믹이 우리에게 준 가장 귀한 유익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팬데믹 이전에는 일에 치여서 그리고 사람에 치여서 정신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는데 이제 모든 사람들의 활동이 현저히 줄어들고 집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아짐에 따라서 우리는 자기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해 볼 시간이 생겼다.

 

어느 신학자는 예상하기를, 이번 팬데믹이 끝나고 나면 영적 종교적 진공상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이제 의심하기 시작할 것인데, 만일 하나님이 정말 전능하시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막지 못하셨냐고 할 것이고, 하나님이 그것을 내버려 두셨다고 하면 하나님의 도덕성이 의심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바이러스를 막지 못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전능하신 분이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가득 차게 될 것이며 기독교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를 의지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며,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런 사태를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도 많이 달라지며 교회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도 많이 달라지게 될 것은 확실하다. 사람들이 예전에는 직접 모여서 진행하던 것들이 이제는 물리적으로 모이지 않고도 화상회의를 통해서 진행하고, 또 먼 거리에 있던 사람과도 훨씬 더 쉽게 화상회의를 통해서 만날 수도 있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에 모이는 것도 물리적으로 직접 모이는 것만이 아니라 펜데믹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집에서 유투브나 줌 등을 통해서 원격으로 예배에 참여하기를 원할 것이다. 이렇게 달라지게 되는 우리의 삶의 새로운 양식에 적응하면서도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적 핵심 가치를 어떻게 계속해서 지켜나갈 것인지 미리 고민하고 나름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 스스로도 과연 가장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일까 물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의심으로 가득찬 세상을 마주하여, 그냥 무작정 예수님이 맞으니까 무조건 따르는 것이 정답이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설득할 수 없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모든 위인들과 그리고 실제와 신화를 모두 포함하고 또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있을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산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사셨고,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을 겪으셨고, 또한 가장 가치 있는 부활을 이루어내셨다. 역사적으로 실재이든 아니면 신화이든 그 어떠한 인물도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예수님처럼 가장 가치 있고 멋지게 이루어내신 분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멋진 삶을 산 인물도 많고, 멋지고 아름답게 죽은 인물도 많으며, 또 극적으로 위대하게 부활했다는 인물도 꽤 있으나, 자기자신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삶과 죽음과 부활을 모두 이루어내신 인물은 오직 예수님 밖에는 없다. 세상이 인정을 하든 하지 않든, 예수님은 사랑과 공의로 삶과 죽음과 부활을 모두 이루어내신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에는 위인들을 동경하며 멋진 인생을 꿈꾸지만 막상 성인이 되고나서는 먹고 사느라 바빠서, 적절하게 섞여 사는 게 잘 하는 것 같아서, 또는 누군가를 돌보고 양육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등등, 그 어떤 이유로든 좀 잊거나 멀리 하며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기회가 생겼다. 각자 자신의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서 가장 가치 있게 사는 삶은 무엇이며 장차 어떠한 죽음이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이 될 것인지….. 무조건 어느 하나가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서 모두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성격과 능력과 재능이 다 다르고 또 삶의 정황이 다 다른데 어느 한 삶이 무조건 최고로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예수님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사셨던 분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러한 삶을 그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그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조금이라도 흉내낼 수 있을까? 그분의 가장 가치 있는 죽음을 조금이라도 흉내낼 수 있을까? 그래서 나의 삶도 가장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나의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이제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증명하신 가치가 왜 가장 뛰어난 가치이며, 우리 모두가 그 가치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치가 팬데믹 이후에도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 가치를 다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고 지켜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들에 대해서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가치 있는 일이다. 가장 가치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 고민하며 생각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개입하실 것이고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도하실 것이다. 이런 기회가 생겼는데도 아무 것도 안 하고 시간만 허비하는 것이 어리석은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민하는 만큼 유익이 올 것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엄청난 슬픔과 어려움이 우리 모두를 덮쳤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제 아주 조금이라도 그 끝이 보이는 것 같은 때가 왔다. 우리가 지혜롭다면 그 끝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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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5. 1. 05:46

더 큰 하나

 

우리 속담 가운데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것이 있다. 사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더 빨리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데, 이와 반대로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된다는 의미로,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될 일도 안 되는 상황을 가리킬 때에 사용된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상황을 수없이 겪어봤다. 소수의 사람들로도 잘 되던 일을 더 빨리 마치려고 사람을 몇 명 더 붙였더니 오히려 일이 안 되고 결과도 더 나빴던 경우도 보았다. 우리 인간들의 한계인 것일까…

 

세상의 통념과는 다르게,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는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더 큰 하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둘이 되고 또 그렇게 셋, 넷, 열, 백, 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에 하나를 더해도 하나이고 또 하나를 더 더해도 하나이고 이렇게 백번을 더해도 여전히 하나인, 그러나 맨처음의 하나보다는 훨씬 더 큰 하나인, 그런 하나가 되는 길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성경은 그렇게 하나로 커지는 하나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며 또한 교회라고 부른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이러한 하나를 희미하게 느끼고 체험할 뿐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면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할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하고 위대하며 신나는 일이 아닌가! 새로운 하늘과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하나됨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가슴이 설렌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우리 크리스찬 각자는 여전히 피조물이라는 한계로 인해서 다른 크리스찬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고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배려를 통해서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며 하나가 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원형이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인류가 잃어버린 원형이었고 예수님으로 인해 회복되었으며 마침내 완성될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이렇게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됨에 대한 맛보기로서, 현재의 교회를 통해 우리는 이 땅에서 더 큰 하나됨을 바라본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더 큰 하나됨에 대한 유비를 매주마다 시전하고 있었다. 바로 찬양대의 합창이다. 40 명이 합창을 하든 100 명이 합창을 하든 화음으로 어우러진 하나의 찬양이 나온다. 여기에 100 명을 더하더라도 동일한 찬양이 나온다. 소리가 더 커지고 웅장해지며 감동이 더 커졌지만 모두가 합하여 하나의 찬양을 노래한다. 우리는 주일마다 교회에서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를 바라보고 있었으면서도, 그 목표를 너무도 제한해 버렸고 그 목표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 앞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전시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으로 눈 뜬 장님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합창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눈을 돌리면 우리의 눈은 길을 쉽게 잃어버린다. 합창으로 보여진 하나됨이 우리의 삶에서는 반목과 질투와 시기와 비판과 경멸과 무시와 억압과 경쟁으로 인해서 깨어지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각자 혼자인 것처럼 느낄 때가 너무도 많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쉬운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참된 크리스찬이 많아야 교회는 더 큰 하나로 성장할 수 있는데, 교회가 세상에서 쉬워 보였기 때문에 크리스찬이 아닌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자기들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조차도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로 녹여내야 하는데, 교회가 오히려 휘둘리고 있기 때문에 쉽게 분열하고 반목하며 서로서로 비판하기만 할 뿐이다. 여기에서 목회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러나 목회자들 중에서도 크리스찬의 진정성을 의심받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니 교회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목회자를 중심으로 하여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가 항상 예수님 안에서 더 큰 하나됨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말씀과 모범으로 양육하고 사랑과 인내로 품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따르며 성장하여 더 큰 하나됨을 누리며 즐거워 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성도들과 연합하는 즐거움이 교회를 넘어서 밖으로 퍼져 나갈 수 있도록 하고, 그 즐거움이 부러워서 교회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해야 한다. 멋지고 웅장한 합창단의 공연에 사람들이 즐겁게 찾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다. 애초부터 그렇게 되어야만 하도록 만들어졌다. 소망과 능력은 예수님께 있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우리는 여전히 피조물이며 목회자도 사람이기에 교회가 커지면 하나됨을 이루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현실적으로는 100 여명이 한계인 듯 싶다. 그래서 수백, 수천, 수만명이 모이는 교회는 하나됨의 즐거움을 교회 전체로는 누릴 수 없다. 소그룹 모임이나 구역별 모임에서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교회 전체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되기는 무척 어렵다. 부목사나 다른 교역자들이 옆에서 보조한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다. 담임 목사가 부목사들과 하나된 교회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니 수천,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는 이미 하나됨을 포기한 상태에서 하나됨의 즐거움이 아닌 다른 즐거움을 찾는 모임이 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교회 전체가 하나되는 즐거움을 누리는 교회는 다른 교회와의 연합도 쉽게 이루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는 다른 교회와의 연합 역시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실력 있는 합창단은 다른 좋은 합창단과의 연합 공연도 쉽게 잘 하지만, 어수선한 합창단은 다른 좋은 합창단이 함께 하더라도 여전히 어수선할 뿐이다.

 

성경은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유비를 사용한다. 나무, 몸, 집, 건물 등과 같이 크기와 상관 없이 유기적으로 하나인 사물을 사용해서 설명한다. 몸은 크기가 아주 작아 아기처럼 작아도 여전히 하나의 몸으로서 모든 기능이 가능하며 크기가 아무리 커져도 여전히 하나의 몸이다. 그리고 크기가 커진 만큼 더 큰 힘이 나오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크기가 커졌다고 해서 다리가 팔에게 필요없다고 할 수 없고 팔이 눈에게 필요없다고 할 수 없다. 크기에 상관없이 유기적으로 하나이며 하나로서 기능하고 하나됨의 즐거움을 누린다. 교회는 부부처럼 두 사람이지만 하나인, 그리고 아이가 생겨서 가족이 늘어도 여전히 하나인 것으로 하나님의 가족이며, 또한 교회는 전체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합창으로 찬양하는 찬양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할 수 있다. 조금 더 인내하고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웃고 조금 더 안아주고 조금 더 형제의 짐을 나누어 지고 조금만 더 예수님을 닮고자 하면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실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있다. 더 큰 하나를 이루며 더 큰 하나됨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교회를 통해서 복음은 더 능력있게 역사할 것이다.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이루어질 미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님도 우리를 참아주시고 계신다는 것으로부터 위로를 얻으며 우리도 서로 참고 인내하며 지금 시작해 보자.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역설적으로 교회의 중요성을 찾아낸 우리들은 지금은 팬데믹으로 인해서 서로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지내야만 하지만 다시 얼굴을 마주하며 모일 수 있는 때가 되면 교회 전체가 하나 되는 즐거움을 누려보자. 모두가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겪으면서 깨닫게 된 이 진리를 교회 안에서 실현해 보자. 우리에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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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4. 24. 21:00

쉬운 기독교, 어려운 기독교

 

크리스찬으로 살면서 때로는 기독교가 쉽게 느껴지고 또 어떤 때에는 매우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크리스찬으로서의 삶, 즉 우리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실현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우리 각자의 삶과 엮여서 다양한 변주와 다양한 비율의 타협이 가능하며 심지어 말로만 믿음을 외치다가 끝나는 경우도 있다. 그 다양함에 따라서 기독교가 쉽기도 하고 아주 어렵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우리는 기독교를 쉽게 느끼는 걸까? 아마도 그 때는사도 바울이 경고한 대로 (딤전 1:6~7), 도덕적 윤리적 선생이 되려고 했던 때로서, 기독교를 머리와 입으로만 아는 경우이다. 그 선생은 이웃과 형제들을 성경말씀을 들어서 정죄함으로써 마치 자신은 그들보다 우월하며 그들과는 다르게 잘 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성경은 이러한 경우에 위선자라고 정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가려져서 그것을 미처 보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은 잘 하고 있다고만 ‘믿었던’ 시기다. 표면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적극적이면서도 본질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면서 성경말씀을 들어서 형제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경멸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형제를 향한 정죄에서 찾고, 또한 우월하기에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느끼는 경우다.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비판함으로써, 자기의 ‘아무것도 안 함’이나 ‘그저그런 상태’가 다른 사람의 ‘잘못 됨’ 보다는 더 좋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착시 현상이다. 중간에 있으면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 비해서 왼쪽에 있는 것뿐인데, 이것이 실제로 왼쪽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착시 현상이다. 그리고 이 착시 현상으로 위로를 얻고 우월감을 가진다. 그런데 성경은 중간에 있는 것이나 오른쪽에 있는 것이나 다 잘못 된 것이라고 한다. 복음은 적극적이며 사랑도 적극적이고 공의 역시 적극적이기 때문에 실제로 적극적으로 행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역시 잘못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죄성과 연약함으로 인해서 너무도 쉽게 빠지는 착각은, 심판자의 위치에 서면 자동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처럼 느끼는 착각이다. 우리 자신도 심판의 기준에 맞게 살아야,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에 사용했던 기준을 우리의 삶에서 실현해야만 우리가 깨끗한 것인데, 우리는 그저 다른 사람을 그렇게 판단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와 다르게 깨끗한 것처럼 느끼는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그 착각을 실제라고 굳게 믿어버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착각에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올 수 없다. 그 착각이 주는 우월감과 만족과 평안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우월감과 만족과 평안을 계속해서 느끼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어 정죄하고 비판하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소위 말하는, 감투를 쓴 사람에게서 많이 드러난다. 감투 없이 평범하게 지낼 때에는 자신을 돌아보며 조심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감투를 쓰고 난 후부터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면서 심판자의 역할을 하고 선생이 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교회에 있다 보니, 감 놔라 대추 놔라 하고 말하는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서 제시한다. 그러면 뿌듯하다. 다 이룬 것 같다. 다 잘 되는 것 같고 하나님께 영광드린 것 같다. 이런 사람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참 쉽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감투가 없어도 이런 게 가능하다.

 

이것은 굉장히 큰 유혹이다. 초대교회 시기부터 있어왔던 유혹이며 지금도 이런 기독교를 원하는 유혹이 너무도 크고 많은데, 우리는 우리의 본성적 연약함 때문에 이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그래서 교회에는 이런 유혹에 넘어간 사람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새 신자와 이 유혹을 이겨낸 사람과 종교성만을 가진 무신자까지 다양하게 섞여 있고, 결국 교회는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이 시끄러움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 지상 교회의 숙명이며, 이겨내는 방법은 이 유혹을 이겨낸 사람이 많아지는 것 밖에는 없다. 윤리적 도덕적 심판자의 위치를 버려야만 한다.

 

이와 반대로 어떤 때에 기독교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걸까? 바로 인내하고 절제해야 하는 때이다. 우리는 육신의 연약함과 본성의 정욕으로 인해서 인내하고 절제하는 것을 어렵다고 느낀다. 성경 말씀을 지식과 말이 아니라 삶에서의 행함으로 실현해 보려고 하면 성경 말씀이 어렵게 다가온다.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과 손 끝으로 실현해 보려고 하면 잘 안 된다. 그래서 삶의 지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많은 가르침들이 ‘인내’와 ‘참음’과 ‘견뎌냄’으로 연결된다.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정의하는 사랑의 첫번째 속성이 ‘오래 참음’이다. 우리 크리스찬은 잘 해도 참아야 하고 잘못해도 참아야 하며, 뛰어날 때도 참아야 하고 못날 때에도 참아야 한다. 선생이 되더라도 너무 선생이 되려고 하면 안 되고, 모르면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데 공부는 인내의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내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우리의 성격조차도 극복해야 한다. 호기심 많고 외향적인 사람은 너무 나대는 것을 참아야 하고, 수줍고 내성적인 사람은 너무 조용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말조차도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적당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묵묵히 자기의 일을 감당하며 남들의 평가와 비판에 흔들리지 않고 성경말씀을 삶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세상의 평가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의 정욕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 극복의 과정이 다 인내와 절제의 과정이다.

 

무엇이든 머리로만 깨닫고 이해하며 말로만 실천하며 남을 판단하는 것은 쉽다. 그런데 깨달은 대로 가슴으로 살고 몸으로 실현하며 남을 판단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의 부족함을 견뎌내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세상은 어떡하든 우리가 남보다 우월하도록 부추기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무명으로 살기를 바라신다.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을 말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열매로 그리고 따뜻한 포용으로 침묵시켜야 한다. 이 어려운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찬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왜 이리 시끄러운지, 왜 맨날 제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은지 또는 왜 별로 능력이 없는 것 같은지 하는 것들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리고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가 감당하도록 도와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결정을 해야 한다. 쉬운 기독교를 버리고 어려운 기독교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쉬운 기독교에 안주하면서 스스로의 만족으로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답은 쉬운 것처럼 느껴진다. 누구든 비록 어렵더라도 어려운 길을 가겠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진심으로 그 어려운 길을 갈 용기가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 길을 가는 것조차 쉽게 생각한다면 평생 쉬운 기독교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 길은 조금씩 변화되어 완성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물이 새로운 삶을 사는 훈련의 길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 주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물이 우리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의 삶을 사는 길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옛 것에 미련을 두지 말고 새 길에서 인내하고 참고 견뎌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 길을 가다 보면, 기독교가 쉬웠을 때에는 뭔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지만 어려웠을 때에는 아무것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우리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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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4. 17. 21:01

시험하시는 하나님

 

누구를 막론하고 시험 보는 것을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학창 시절이나 사회 생활을 하거나 언제 어디서든 시험이 있다고 하면 마음이 가라앉고 긴장되고 두렵고 떨리기 시작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시험에서 점수를 잘 받아도 그냥 시험은 멀리하고 싶은 것이다. 시험 받는다는 것 자체가 그냥 두려운 것이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살전 2:4; 고전 10:13). 그리고 또한 사탄도 우리를 시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전 7:5; 살전 3:5). 이 두 가지 시험들은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우기 위해서 시험하시지만 사탄은 우리를 무너뜨리고 망하게 하려고 시험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우리 각자 또는 우리 공동체가 어떤 위치와 상태에 있는지 우리 스스로 알게 하지만, 사탄이 주는 시험은 죄를 향한 유혹이며 이 시험은 Pass 또는 Fail 밖에는 없는 시험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든 사탄이 주는 시험이든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도록 되어 있다 (고전 10:13).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심사위원이나 심판관이 아니라 아버지이자 선생님으로서 시험을 주시는 것이므로 시험은 우리의 실력을 길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그냥 시험을 내고 채점을 해서 점수에 따라서 상벌을 결정하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로서 자녀의 성장을 위해서 시험을 내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래야먄  시험에서의 실패조차도 우리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성장하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의 위치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시험이든 시험을 보지 않고는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명확하게 알기가 매우 어렵다.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잘 하고 있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심지어 무엇을 잘못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눈 감고 무조건 우길 수가 없게 된다. 시험 결과가 눈 앞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에 눈 감고 무조건 우기면서 잘 하고 있다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게 된다. 위선자가 되거나 고치거나 둘 중에 하나만 가능하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라면 결국 고치게 되고 성장하게 된다. 이렇듯 시험 자체는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어서 피시험자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험을 싫어하고 두려워 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바꿔보면 시험을 무턱대고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물론 시험을 당할 동안에는 고통스럽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겠지만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약속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약 1:2; 벧전 1:6). 더욱이 주님이 우리를 도우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히 2:18; 벧후 2:9). 그러므로 시험 하면 학창시절의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보던 기억을 떠올리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점수를 매기고 등급을 나누며 우열을 가리기 위한 것이 전혀 아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시험은 필수적이다. 태초의 사람 아담도 시험을 받았고 우리 주님도 시험을 받았으며 선생님 아래에서 자라는 모든 학생은 시험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또한 선생님이시므로 자신의 자녀이자 학생인 우리를 시험하신다. 시험 받는 것을 거부하거나 회피할 생각 보다는 오히려 시험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꿔서 시험을 달갑게 생각해야 한다.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방향을 알 수 있고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깨달을 수 있으며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시행되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이 주는 시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낸 주님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시험조차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한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는 대부분의 원인은 우리의 욕심이다 (약 1:14).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우리의 욕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시험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탄은 우리의 욕심을 아주 잘 이용한다. 이 시험은 우리의 욕심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우리의 육신의 본성의 어두움을 보게 하고, 그 욕심을 성령님의 권능으로 이겨내게 훈련시켜 주기 위한 시험이다. 우리의 자아가 변하고 인격이 변하도록 주시는 시험이다. 그러나 순전히 우리의 성장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도 있다. 욥이 받은 시험이 대표적이다. 욥이 시험을 받는 기간 동안 그가 당해야 했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기도 어렵지만 그 모든 시험 동안 욥이 점점 성장하였으며 마침내 시험이 끝나고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더 깊이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는지 생각해 보면 욥은 우리가 아주 조그만 용기라도 낼 수 있도록 위로가 되는 증인이다.

 

따라서 시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두려움과 긴장과 걱정과 염려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성장에 대한 기대와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에 대한 기대이다. 그리고 시험 결과에 무너지지 말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약점을 극복해서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자세이다 (엡 5:10). 우리 모두는 각자 다 다르다. 같은 지역에 살더라도 삶의 정황도 다르고 개성과 성품도 다르고 선호도도 다르며 모든 게 다 다르다. 나와 똑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래서 나의 부족함과 약점은 하나님과 나만 알 수 있고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나의 성장을 이끌어 주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나의 인격과 삶에서 열매맺을 것을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어느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시험에도 지지 말고 시험 결과에 실망하여 무너지지 말자. 무수한 시험이 있었고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지만 한가지 진리는 명백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시험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돕고 계셔서 우리가 시험을 이겨내고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시험을 당하는 잠시 동안은 기쁘지 않고 고통스럽겠지만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게 되는 특별한 기간이라는 것과, 그리고 시험이 끝나고 우리가 얼마나 성장할 것이며 실력이 늘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큰 위로와 은혜와 기쁨을 생각하며 극복해 보자.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인내와 노력과 수고를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더욱 닮아가는 기회임을 생각하며 용기를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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