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요즘 꼰대라는 말을 부쩍 자주 사용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한정적으로 사용되던 말이 요즘에는 비교적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용되면서 그 의미도 조금 변한 것으로 보인다. 꼰대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처음에는 그냥 은어로서 ‘늙은이’ 또는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이었느나 요즘에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사람’ 정도로 모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이가 젊은 사람도 꼰대가 될 수 있다. 사상적으로 개인주의, 다양화, 포스트모더니즘 등 자기 주장이 강화되는 시대에 다른 사람의 강요를 무턱대고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이제 현대의 젊은이들은 세상의 지혜를 노인으로부터 듣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언제 어디서든 필요하면 스마트폰을 열어서 자기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검색해서 자기가 결정하면 된다. 듣는 지혜가 아니라 찾는 지혜의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예전의 구태의연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현상은 이제 나이나 성별이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나타날 수 있게 되었다.
목사들은 꼰대스러운 사람으로 변하기가 훨씬 더 쉽다. 그들은 수천 년도 더 지난 경전을 들고 수백 년도 더 지난 신학과 교리를 설파하는 사람들이니 얼마나 쉽게 꼰대가 되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목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기 말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니 무슨 말만 하면 수백 년도 더 지난 얘기를 강요하는 것처럼 해대니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목사는 개신교 시스템 상으로도 꼰대로 변하기 쉬운 환경에 놓이게 된다. 한 번 목사나 장로가 되면 거의 평생 그 위치에 있게 되고 또 자신을 견제하거나 제지할 권위를 가진 사람이 주변에 거의 없으며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며 충고하는 역할만 수십 년 동안 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과 상황에 오랫 동안 빠져있으면 목사는 자기만의 우월한 세계에 빠지기가 너무도 쉽다. 그러니 구태의연한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데, 그런 구태의연한 생각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작용하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이 강요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린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신실한 목사가 더욱 꼰대스럽다는 사실이다.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굳게 ‘믿는’ 상황이 되면 절대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찬이, 특히 목사가 꼰대가 되면 안 되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꼰대는 소통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꼰대스러움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구태의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부분이 아니라 그 생각을 강요하거나 그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 나이 또는 경험을 들어서 상대방을 압박한다는 것에 있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모든 말이 여기에 속한다. 요즘처럼 자유분방한 시대에 생각의 강요는 자유로운 소통이 불가능하게 만들고, 따라서 진정한 대화는 꼰대스러움의 꼰만 나타나도 실종되는 것이다. 대화하는 당사자들 모두가 서로서로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공감하고 수용하려는 자세를 취해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한데 꼰대스러운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모든 대화가 그 사람으로 인해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듯 소멸된다. 꼰대 한 사람의 주장을 수용하든지 아니면 말든지로 끝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꼰대 목사가 되는 것은 끼리끼리의 정치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아우르는 목회가 아니라 꼰대 목사의 말을 듣는 몇몇 사람들만 모여서 자기들이 공동체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상태로 만들며 그 안에서 안주하는 목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이러한 사람은 아주 초보 신앙인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신앙인은 결코 꼰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앙이 자라서 성숙할수록 다른 사람의 의견과 주장을 경청하며 공감하고 한마음을 이루는 데 소홀함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했던 내용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 3:16~17). 이 말씀에서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라는 가르침에 주의해야 한다. 이 말씀은 서로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려면 곧 서로서로 배우고 권면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말씀이 에베소서에도 기록되었는데 약간 다른 점은 이러한 가르침이 성령 충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 5:18~21). 이렇게 두 말씀들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것’은 ‘피차 복종하는 것’이며 이는 성령 충만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따라서 꼰대 목사는 성령 충만하지 못한 목사이며 전혀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단서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신실한 사람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하며 하나 됨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공동체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공감하고,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며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게 하려고 애쓰게 된다. 피차 가르치며 피차 권면하며 피차 복종하는데 노래가 나오고 기쁨과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 충만하며 신실한 사람은 결코 꼰대스럽지 않다. 자기만의 확고한 신학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한마음이 될 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심을 생각과 체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목사를 비롯한 어느 성도라도 자기가 성령 충만한지 아닌지 고민스러울 때에는 자기가 꼰대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면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세대간의 차이를 넘고 인종과 성의 차이를 넘어서 어느 누구와도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따져보면 알 수 있으며, 뿐만 아니라 그 대화를 통해서 상대방과 나, 곧 우리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며 상대방을 통해서 주시는 가르침을 적극 수용하고 나의 삶에 적용하는지 아닌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은 때로 어리석어서 자기 스스로에게 속아넘어갈 수도 있어서 겸손도 꾸며낸 겸손이 가능하고 스스로 즐겁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감사드릴 수도 있다. 그러나 피차 가르치고 피차 권면하며 피차 복종하는 것은 결코 꾸며낼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공동체와 하나 된 사람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꼰대 목사는 공동체를 파괴한다. 공동체를 나누고 분리시키고 자기와 뜻이 맞지 않는 그룹을 왕따시키며 무너지게 한다. 그래서 목사는 어떠한 노력을 통해서든 꼰대 목사가 되는 것을 피하여야 한다. 이것이 목사가 성령 충만하기를 반드시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며 행여라도 그렇지 못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꼰대가 되는 것을 어떡하든 피하려고 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피값을 주고 사신 공동체를 파괴하고 흩어지게 하며 해치는 목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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