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위로'에 해당되는 글 77건

  1. 2021.08.07 포도원의 품꾼 비유
  2. 2021.07.31 기독교에 대한 무관심
  3. 2021.07.24 하나님의 사랑
  4. 2021.07.17 위선의 늪
  5. 2021.07.10 순종이 찬양이다
  6. 2021.07.09 참된 겸손과 꾸며낸 겸손 1
  7. 2021.07.03 하나님의 집의 그릇들
  8. 2021.06.30 가라지 비유
posted by 풀숨 2021. 8. 7. 04:23

포도원의 품꾼 비유

 

마태복음 20 장에 보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포도원의 품꾼 비유가 나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루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 포도원 주인과 같다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 비유는 바로 앞 장에 있는 사건, 즉 부자 청년과의 대화의 사건으로부터 이어져서 하나의 교훈을 극명하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우선 먼저 이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그런데 보다 더 중요한 점은 우리의 사고의 패러다임 개혁을 요청한다는 것에 있다. 즉, 요점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기 위해서 우리의 사고 방식의 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비유이다. 이런 결론이 내려지는 이유는 이 비유의 맨 마지막 구절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먼저 된 자는 먼저이고 나중 된 자는 나중인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역전될 수 있다는 말씀은 우리의 사고를 전적으로 개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및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이것은 부자 청년의 생각에서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의로움을 따라서, 즉 율법의 조항들을 문자적으로 지켜온 자기들의 업적과 성과를 근거로 해서,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과 달리, 자기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또 들어가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의로운 자기들은 불의한 세리나 죄인들과 결코 함께 자리에 앉아서도 안 된다고 여길 만큼 ‘자기 의 (self-righteousness)’를 내세웠다.

 

그러한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포도원의 품꾼 비유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서 노동을 한 사람들은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다는 업적이 있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내가 이만큼 실적을 쌓았다’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은 포도원 주인 앞에서 자기를 내세울 근거가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의는 자기의 노동 시간에 비례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과 자기들이 동일한 취급을 받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맨 먼저 와서 열심히 땀흘려 일한 자기들은 마땅히 더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받지 못하였으므로 오히려 빼았겼다는 생각, 곧 상대적 박탈감을 갖게 되었고 이 박탈감은 분노를 일으켰고 그 분노는 포도원 주인을 향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나를 저런 자들과 똑같이 취급했다’는 생각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차별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자기들이 더 받든지 아니면 나중에 온 모든 사람들이 덜 받든지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극히 세상적인 사고 방식은 포도원 주인의 행동에 의해 근본적인 도전을 받는다. 주인에게 있어서 정의는 모든 품꾼들에게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었다.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차별적으로 품꾼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품꾼들이 자기의 업적과 능력에 상관 없이 우선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이 주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만약에 포도원 주인에게 포도원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면 그는 아침 일찍 모든 필요한 품꾼을 다 모아서 포도원에 들여보내면 될 일이었다. 몇 번이나 장터에 가서 품꾼들을 더 부를 필요 없이 한번에 필요한 품꾼들을 불러서 하루의 작업을 다 마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주인은 개인의 성과 또는 일의 효율이 아니라 하루를 굶어야 하는 사람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그들을 가엽게 여기고 다시 장터에 나가서, 어쩌면 포도원 작업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품꾼으로 계속해서 고용했다. 이것은 사실 포도원 주인은 아무런 품꾼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결국 아침 일찍부터 일한 품꾼들 역시도 사실은 은혜를 입은 것이었다. 포도원 주인의 마음이 하루 하루 품삯을 벌어서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향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었던 것이지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 둘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서 그리고 포도원 주인의 은혜를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분노에 찬 항의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사고 방식은 세상적인 사고 방식과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는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의 성과를 통해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차별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은혜 중심적이며 그 은혜는 차별 없이 모두를 살리는 방식이다.

 

여기까지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이다. 이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살펴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은혜를 베푸는 나라 정도로만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깊이가 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불평하는 품꾼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대답한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포도원 주인의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많으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답게 사는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포도원 주인의 말을 인정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포도원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삶과 생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 부자 청년의 말투는 조심스러운 듯 했지만 자세는 당당했다. 자기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고, 그랬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는데 부족한 게 있을까요? 그러니 예수님이 보시기엔 어떠한가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온전하게 되고 싶으면 가서 네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모든 소유’에 있을 것이다. 부자 청년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한 말씀이었다. 그는 표면적이고 문자적인 율법을 지켰을 뿐, 율법의 정신 곧 하나님 나라의 법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은혜 베푸는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이 마음의 부자가 되는 지름길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자기 중심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다. 그와 반대되는 길은 자기 중심적인 시각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은혜로 인식하고 또 받은 은혜를 기초로해서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우리는 생각과 삶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특별히 뭔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더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의 개혁은 많은 훈련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것은 머리 속에서는 한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삶에서는 무수한 훈련을 통해서만 마음에 심어지고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심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받아주심을 우리가 제대로 올바르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식하고 그 받아주심을 토대로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변화되어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무시하게 한다. 그 주인을 대하는 품꾼들의 태도와 말에서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은 오직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를 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며,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인식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자기의 성과를 내세우며 정작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받을 것만을 셈하는 상태에 빠지며, 성과를 통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우열을 가리고 차별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저런 사람과는 다릅니다 하고 자신을 내세우지만 이것은 은혜를 무시하고 은혜를 베푸신 분을 무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정리해 보면, 사실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이미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 철저히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부정하고 자신이 이룩한 아주 아주 아주 작은 성취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 대가를 요구하며 항의하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더욱 불행한 것은 사람은 그 어리석음조차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역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물 속 개구리를 밖으로 꺼내주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개구리는 우물이 우주라고 생각하며 일평생을 그 안에서 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밖으로 꺼내어졌다면 밖의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살려면 우리는 생각과 삶의 패러다임을 철저히 개혁해서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다. 우리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하늘의 보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지식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하려고 할 뿐, 우리의 생각의 패러다임을 개혁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말씀의 씨앗이 길가에 떨어지거나 가시밭에 떨어져서 열매맺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서 열매맺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면 위선자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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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7. 31. 16:52

기독교에 대한 무관심

 

올해 5 월에 갤럽에서 한국인의 종교 상황에 관한 리포트를 발표했다. (참고: 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1208 )

전체적으로 종교인의 분포를 보면, 먼저 개신교가 17 퍼센트로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불교가 16 퍼센트, 천주교가 6 퍼센트였으며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 사람은 60 퍼센트가 되었다. 연령대로는, 20대의 사람들은 22 퍼센트, 30 대는 30 퍼센트, 40 대는 32 퍼센트, 50 대는 43 퍼센트, 그리고 60 대 이상은 59 퍼센트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다. 이 비율은 2004 년에 54 퍼센트로 정점을 찍은 후에 계속 내리막이어서 40 퍼센트까지 왔다. 이 변화 추이에서 놀라운 점은, 2014년과 비교했을 때에 40 대의 감소폭이 19 퍼센트로 가장 컸으며 50 대의 감소폭이 그 다음으로 17 퍼센트였다. 인구 분포의 허리에 해당하며 가장 영향력이 있는 연령대에서 종교를 믿는 사람의 비중이 제일 많이 감소했다.

 

또한 종교가 없다고 응답한 사람들에 대한 심층 조사에서는, 과거에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람들 중에 52 퍼센트의 사람들이 과거에 믿었던 종교가 바로 개신교였다. 또한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호감이 가는 종교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개신교를 대답한 사람은 6 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교회를 떠난 이유 그리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그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그것은 기독교가 사람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또한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자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무관심한 것이다. 기독교가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무종교인에게 아무런 관심거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기에 주변을 잠깐만 돌아보아도 눈에 띄는 수많은 십자가가 그들에게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가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먼저 사회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이 공정과 정의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기득권 세력에 편승하여 약자를 이용해서 자기 배를 불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기독교인들이나 무종교인들이나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삶에서는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신앙하면서 멋지고 매력적인 인격을 갖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전전긍긍하고 거짓과 술수를 이용하는 약삭빠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무종교인들이 하는 행동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기에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끼리끼리 자기네들끼리 뭉쳐서 잘 어울려 다닌다는 것 정도뿐이다.

 

사실 기독교가 사회 정의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같은 단체들이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유투브에도 많은 기독교인 유투버들이 의로운 삶과 사회 정의에 대해서 열심히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무관심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런 단체들의 사회 정의를 향한 노력이 그렇지 않은 기독교인들의 비윤리적 부정의적 행태에 오히려 압도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의 수많은 집단 이기주의적 행태가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나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이웃들에게 코로나 감염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교회들이 앞장 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염의 위험을 몇 배나 증폭시키는 모임을 숨어서 개최하고, 그것이 들통나자 목사나 장로들이 서슴없이 거짓말을 하는 지경까지 TV 뉴스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니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나 훌륭한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적 사회 정의를 위해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기독교인들의 위선만 드러날 뿐이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설교가 행해졌지만 2010 년 이후에는 복에 대한 설교보다는 공의와 사랑에 대한 설교가 더 많아졌다고 보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의 삶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불의하고 기회주의적이며 돈만 좇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교회 내에서도 무리를 만들어 서로 대립하고 자기 맘에 맞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며 다른 무리에 속한 사람과는 담을 쌓고 살거나 배척하며 사랑의 모습을 전혀 보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사기치거나 이간질하고 왕따를 시키기도 한다. 눈 앞에서는 상냥하고 친절한데 뒤에서는 없는 말도 만들어서 험담을 하고 다니기도 한다. 마태복음 23장을 읽어보라. 여기에 기록된 위선자들의 삶이 뉴스에 나오는 한국 교회들과 무엇이 다른지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지역 교회들에서 발생하고 있는 부정적인 모습들만 본다면 교회나 세상이나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다. 이렇게 차이가 없으니 그냥 차라리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에서 시간 들이고 돈 들이고 에너지와 노력을 들이고도 세상과 차이가 없는 게 뻔히 보이는데 누가 교회에 출석하려 하며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겠는가. 이게 현실이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청년들이 교회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권면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가 자기 자랑을 하고자 했거나 또는 교만해서 그런 말은 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의 삶의 예시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복음이 선포된 곳에서 당연하게 따라오는 질문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현재의 삶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나를 보아라’ 하고 답한 것이다. 사도 바울의 삶의 정황에서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삶이 무엇인지 예를 보여주며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예수님을 본받아 살기를 권면했던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이렇게 청년들에게 말할 수 있는가? 나를 보아라, 나처럼 예수님을 믿는 삶을 살아라, 하고 청년들에게 권면할 수 있는가? 이러한 성도가 있는 지역 교회가 과연 한국에 몇 개나 있을까? 또는 교회의 청년들이 본받고자 하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가 있는가? 그런 교회는 복받은 교회다. 이제 우리는 교회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예수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심각하게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

 

사도행전은 성령님의 역사가 어떻게 세상에 전파되어 가는지 잘 보여준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삶이 극적으로 달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의 삶도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것처럼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보아야 한다. 그는 자기의 의에 빠져서 위선적인 삶을 살다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뵙고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본받아 살았다. 세상적 명예와 자기의 의를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는 의와 사랑과 참된 평안을 위한 삶이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함께 다른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은 정말 다른 삶을 사셨다. 어마어마한 능력과 지혜와 지식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권력이나 부나 명예나 그 어떤 것도 탐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 모든 치욕과 수모와 고통과 어려움을 다 감당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따를 수 없는가. 우리는 많은 것을 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세상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면 된다. 이웃에게서 이익을 빼앗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지 않고 남의 여자를 탐하지 않고 돈이 전부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정직하게 섬기는 삶이면 된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매일 10 분 기도하고 20 분 성경말씀을 읽어보자. 그리고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님이 감동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 대로 하루의 삶에 무조건 그냥 무조건 적용해 보자.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살도록 해주신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소리쳐 “예수님을 믿으세요” 하고 외치지 않더라도 삶으로 증거하는 외침이 더욱 크게 사람들에게 느껴진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향기요 하나님의 나라의 대사 직분을 받은 사람이므로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삶의 정황에 따라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부르실 만큼 진심으로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오히려 세상 사람을 지옥으로 안내하는 위선자가 될 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 주님 다시 사셨다! 이 말씀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말씀이 나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자. 이 말씀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만일 이 말씀이 마음에 울린다면 삶을 바꾸어 보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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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7. 24. 22:14

하나님의 사랑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 화목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1 절 가사이다. 우리는 교회에 함께 모여 이 찬송을 수없이 불렀다. 그런데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가? 마치 연인의 사랑을 책으로 배운 것처럼 혹시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는 책으로 배웠거나 관념적이고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는 있으나 생명이 없고 역사가 없고 권능이 없으며 아무런 열매가 없는 사랑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스스로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성경 전체가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상들과 다르시다는 것이다. 우상들은 모두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고 입이 있으나 말하지 못하며 손과 발이 있으나 아무런 역사를 만들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보시고 들으시고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다. 또한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신 분으로 기쁨, 슬픔, 분노, 질투, 좋음, 싫음 등의 감정을 표현하신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하나님은 진정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구절까지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느끼고 알고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사랑이다. 그냥 관념적이어서 머리로만 아는 그런 사랑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사랑을 뉴스처럼 들으려고 한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랑이나 혹은 주변의 어느 누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마치 TV에서 뉴스를 듣는 것처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이야기처럼 듣는다. 그 동일한 사랑이 바로 지금 나에게도 부어지고 있으며 나는 그 사랑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자꾸만 머리 속에 붙잡아 놓으려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우상과 똑같이 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결코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분의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느끼며 경험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가르치기를,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다고 로마서 5장에서 말하였다. 그냥 좀 사랑이 느껴진다는 정도가 아니라 통째로 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분명히 뭔가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명확하고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 대신에 나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며 하나님을 철저히 무시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진정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러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거나 멸망시키시지 않고 우리의 배신과 반항까지도 품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랑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역사에서 드러난 사건은 이러하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에 우리의 배신과 반항, 즉 우리의 죄를 그냥 없었던 것으로 하실 수는 없으므로 어떻게 하든 그에 따른 형벌을 내리셔야 했다. 그런데 사람은 그 형벌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스스로 감당하신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친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우리 대신에 다 받게 하셨다. 그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기록하였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얼마나 깊고도 큰지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2000 년 전에 역사 속에서 드러난 그 사랑,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랑은 지금 이 시간에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울리고 우리의 삶에서 느껴지는 사랑이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우리의 삶에서 알 수 있다. 책으로 배우고 머리 속에만 있는 사랑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이 사랑을 먼저 알고 나야 우리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작은 사랑들도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가장 크고 위대한 사랑조차 사랑으로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그 외의 다른 사랑을 어떻게 사랑으로서 경험할 수 있겠는가.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써 나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그렇게 큰 사랑을 사랑으로서 깨닫지 못하면서 하루의 음식과 거처를 마련해 주신 사랑을 과연 사랑으로서 느낄 수 있을까.

 

그 사랑을 알고 깨닫고 나면, 이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았을 때에 ‘아 그때 그랬던 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특별히 내 삶에 개입하셨던 거였구나!’ 하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생각나게 된다. 사랑은 사건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런 일도 없으면, 즉 어떤 사건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난 세월을 되돌아 보면서 하나님을 믿은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이러한 사랑의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면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를 결코 그냥 혼자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아버지로서 사랑으로 반드시 그의 삶에 개입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순간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든지 아니면 내가 지독하게도 무감각하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랑은 우리가 혼자서 상상하며 짜릿해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잔잔히 스며들어 가슴을 적시면서도 부모님의 사랑처럼 실제적으로 느껴지는 사랑인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화목한 가정이 중요하다.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따른다.) 잘 했을 때에도 느껴지는 사랑이고 잘못 했을 때에도 느껴지는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삶에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때로는 놓칠 수도 있지만 잠시만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 보더라도 금방 깨달을 수 있는 사랑이다. 심지어 우리가 질병과 고통과 고난과 아픔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동안에도 느껴지는 사랑이다. 오히려 이러한 동안에 더 잘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 세계를 초월하므로 이 땅에서는 사랑이 아닌 것처럼 보여지는 것도 영원한 세계에서는 너무도 큰 사랑이기 때문이다. 마치 부모님의 징계를 받는 아이처럼 징계를 받는 동안에는 그 징계가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징계를 받는 동안에도 부모님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회초리로 징계를 받은 후에 하나님이 우리의 아픈 상처에 약을 발라주신 것을 우리는 깨달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의 회초리를 맞아본 적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히브리서는 기록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가 기록한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은 내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의 서신서인 요한1서는 5 개의 장, 105 구절로 이루어진 비교적 짧은 서신이지만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구절이 30 구절이나 될 만큼 사랑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다. 요한1서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실제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또한 그 사랑 안에 머무르며 그 사랑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랑을 느끼며 경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쁘게 순종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며 마음껏 하나님을 사랑하자.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어 하나님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광을 누리며,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도록 우리가 사랑의 통로 역할을 감당하자. 사랑은 그 어떠한 두려움도 이기게 하며 고난과 어려움도 인내하게 하고 소망을 품으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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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의 늪

 

우리 주님이 공생애의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 주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책망을 받았던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 (마 23:13, 15, 23, 25, 27, 29). 그들은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종교적인 권위를 가진 지도층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가장 많은 책망을 들었으며 책망의 내용도 아주 신랄한 것뿐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그들은 위선자요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책망이었다. 하얀 페인트로 무덤의 겉을 칠해 놓아서 겉은 그럴싸 한데 속은 죽은 뼈들 밖에는 없다는 의미이다. 개역개정본에는 ‘외식’이라는 단어로 위선을 표현하고 있기에 그 의미를 어렵게 해서 가려놓고 있지만 영역본의 경우에는 hypocrite(위선자)라는 단어로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위선자의 대표적인 행동은 자기를 잘 포장하고 또 남을 쉽게 비난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행위나 삶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대체로 눈 감고 넘어가지만, 다른 사람의 아주 조그만 잘못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고 비난하고 정죄함으로써 마치 자기는 그러한 잘못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라고 포장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우리 주님이 아예 대놓고 책망하시기를,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눅 6:42)고 하셨다. 또한 위선자는 남들이 볼 때에는 거룩한 척하지만 아무도 없거나 누구도 볼 수 없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아무런 꺼리낌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위선자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며, 조그만 이익인데도 그것을 위해서 그 어느 것도 손바닥 뒤집듯이 버리기도 하고 취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찾아다니며 그것을 통해 자기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포장과 함께 위안을 누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교회 내에서도, 예를 들어, 설교 말씀을 듣거나 어떤 충고를 들었을 때에 그 말씀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먼저 적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그를 정죄한다. 흔하게는 아마도 이런 식일 것이다. 설교 시간에 어떤 말씀을 듣다가 ‘아 이 말씀은 박장로가 들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거나 또는 주위를 둘러보며 ‘아 오늘 김집사가 안 왔네. 이 설교를 들어보고 좀 깨달으면 좋겠는데…” 같은 생각을 했다면 그것이 바로 위선의 시작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위선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자체가 이미 위선에 빠져버렸다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모든 설교 말씀은 우선 그 말씀을 듣는 자신에게 먼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위선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히 눈을 감고서는 밖으로만 눈을 뜨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찾아다니는 것이야말로 위선의 시작이다. 이 지점을 지나면, 이제 실제로 남의 허물을 비난하고 정죄함으로써 남을 무너뜨리고 자기 자신은 거룩하다는 평판을 얻어 만족을 누리며, 더 큰 허물을 가진 다른 사람을 찾아다닌다. 교회가 분란과 분열과 파당 싸움으로 가득하게 되는 지름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런 자들을 참으로 강하게 책망하셨다. 위선자요 회칠한 무덤이요 독사의 새끼라고 하셨다.

 

우리는 어떤가? 자연적 상태에 있는 사람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다를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심지어 거듭난 사람도 여전히 육신의 죄성으로 인해서 누구나 위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눈은 항상 밖을 향해 열려 있어서 다른 사람을 먼저 보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님으로 인해서 자신을 알기에 위선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거나 설교 말씀을 듣거나 기도하는 동안에 성령님이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며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므로 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은 성령님의 이러한 인도하심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 수가 없고 따라서 위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물론 윤리적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통해서 심각한 위선에 빠지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스스로 보는 것에 한계가 있으며 또는 편견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또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완전히 진리이시므로 우리의 모든 잘못을 정확하게 교정해주실 수 있다. 비록 우리의 역량과 실력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따라갈 수는 없을지라도 성령님의 인도하심 자체는 완전하기에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전심으로 따르고자 한다면 위선을 이겨낼 수 있다.

 

디모데후서 4장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뒷부분을 NIV에서 번역하자면 “그러한 가르침들은 위선적 거짓말쟁이들을 통해서 오며 그들의 양심은 뜨거운 인두로 지져 말라비틀어져 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그들은 이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자기의 양심을 되살릴 수 없게 되었고 사탄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미혹하며 거짓을 퍼뜨리지만 스스로는 결코 잘못됨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위선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겉으로는 진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겉으로도 거짓으로 보인다면 누구나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지만, 그것이 비록 속으로는 술수와 사기와 거짓일지라도 겉으로는 진리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속아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에 대해서 평가하신 말씀이 바로 그들의 말은 따를지라도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말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 같지만 실제 행위는 거짓과 폭력과 억압과 착취와 사기였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정도의 위선자를 찾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뉴스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의 말로는 ‘선택적 정의’라고도 할 수 있고 또는 ‘내로남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에게는 항상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먼지 하나라도 털어대면서 정작 자기 자신이나 자기 친구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잣대로 그냥 넘어가는 사람들이 뉴스에 나온다. 지역 교회 안에서도 그렇다. 특히 지역 교회에는 위선자들이 많이 있을 수 있는 구조를 가졌다. 지역 교회에 출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선자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상당수가 위선자일 가능성은 있다. 이것은 진리가 교회 안에서 선포되고 있어서 귀로는 진리를 들을 수 있으나 삶으로는 진리를 무시할 기회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습관이 될 정도로 방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 교회들은 성령님과 함께 리더들이 그러한 사람들의 삶도 진리로 이끌어야 하는데 리더들조차도 위선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있고 또 리더들의 수가 제한적이어서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까지 돌볼 수 있는 여력이 없기에 그러한 사람들은 사각지대에 놓이고 자기들만의 기준을 스스로 정해서 교정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는 구조로 쉽게 빠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교회에 모이는 회중의 크기가 리더들의 수에 맞게 적절해야 하는데 요즘은 무조건 큰 교회를 추구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다. 목사나 장로들은 교회가 크면 마치 자기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우쭐대고 그러한 교회의 교인들은 마치 자기는 대단한 집단에 소속된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목에 힘을 준다. 위선에 빠진 전형적인 형태인데도 교회 전체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또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하지만 그 말이 정작 상식적이지도 않은 주장이라는 것을 자신들만 알지 못한다. 그러니 교회 밖의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말하기를, ‘저런 하나님을 누가 믿겠느냐’ 하면서 오히려 교회를 조롱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데도 그 안에 갇혀 있어서 오히려 적반하장식으로 더욱 어리석은 주장을 하게 되고 교회를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거나 설교 말씀을 듣거나 기도를 하거나 찬송을 부르거나 어느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거든 항상 그 말씀을 나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눈이 나 자신이 아니라 남을 먼저 향할 때에는 반드시 위선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어떻게 하든지 나 자신을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고 무조건 적용해야 한다. 위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이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었을 때에 ‘아 좋은 말씀이네. 은혜 받았네’ 하고 그냥 습관적으로 넘어가면 그것은 이미 위선의 징후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 말씀은 박장로가 들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한다면 위선이 시작된 것이며, 만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을 정죄하고 비난한다면 위선에 빠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은혜 받았다면 그 말씀이 먼저 나 자신에게 적용되어 내 삶을 변화시키고 열매 맺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래야 위선의 늪에 빠지지 않고,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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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7. 10. 21:05

순종이 찬양이다

 

골 3:16~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아마도 90년대 정도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부터 교회들마다 찬양 예배를 수요일 저녁이나 금요일 저녁 또는 주일 저녁에 드리기 시작했다. 설교 위주의 주일 예배 형식이 아니라 찬양 위주의 자유로운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유행처럼 교회들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참 지난 후에는 바디워쉽 또는 몸으로 드리는 찬양 예배라 하면서 노래와 함께 춤을 추면서 자유로운 형식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노래와 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존귀한 이름을 찬양하는 것은 너무도 마땅한 일이다. 히브리서 기록자 역시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찬양 예배가 유행처럼 퍼지면서 찬양은 마치 입술로 드리는 찬양만이 전부인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하였다. 시편 말씀을 먼저 살펴 보자.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 101:1).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시 119:164). 또한 에베소서에서는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2) 하셨으며, 빌립보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 1:11) 하셨다. 이 말씀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말씀들에 있는 찬송 또는 찬양도 우리가 입술로 드리는 찬양을 의미하는 것일까.

 

먼저 시편 말씀들을 간단히 살펴 보면, 인자와 정의를 노래한다는 것이 오직 입술로만 노래하고 삶에서 실천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또한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주를 찬양한다는 것이 오직 입술로만 주님의 의로운 규례들에 대해서 노래하는 것이라면 진정한 찬양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의로운 규례들을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면서 입술로만 의로운 규례들을 노래한다면 그것은 위선자의 전형적인 겉치레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의로운 규례대로 살아봐야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되고 그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향해서 진정한 감사와 찬양이 나올 수 있다. 에베소서의 말씀과 빌립보서의 말씀도 동일하다. 우리가 찬송이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의롭고 사랑이 풍성한 삶이 곧 찬송이 되는 것이다.

 

골로새서의 말씀도 동일하다. 이 말씀에서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이다. 그래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것은 진리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지식은 필요하다. 알아야 분별할 수 있고 알아야 방향을 잡을 수 있고 알아야 올바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으로서 머리에만 머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하나 되어 말씀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의지와 감정과 행위의 근원이 되어서 우리의 모든 행위는 주님의 말씀의 열매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면, 주님의 모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편 119:9, 11 말씀이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결국 주의 말씀을 나의 삶에서 구현해내는 것을 통해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래야 살아있는 노래가 나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찬양’이라는 단어를 입술에서 나오는 찬양과 함께 순종의 삶에서 나오는 찬양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입술에서 나오는 찬양에만 익숙해져 있기에 이제는 무엇보다도 삶에서 나오는 찬양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찬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삶에서 나오는 찬양이라는 의미로 더욱 치중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어느 정도 균형잡힌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수십 년 전에 찬양과 삶이 하나로 하나님께 드려진 이야기가 있다. 그 당시의 나는 10년 동안 담배를 애용했던 골초였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담배를 두 갑 정도씩 피워댔었다. 몇 번이나 끊으려고 하기도 했었지만 모두 실패하고서 그냥 포기하고 지내는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날 갑자기 찬양대에 서고 싶어졌다. 예배 중에 찬양대를 보면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지휘자의 권면이 있어서 얼른 찬양대에 합류하였다. 그리고는 찬양대에서 함께 찬양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좋았었다. 그런데 어느날 나의 찬양하는 입술에서 담배 냄새가 많이 난다는 얘기를 건너 건너 들었다.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담배를 끊는다는 것이 생각 만큼 쉬운 것이 아니었다. 기도도 하고 결심을 반복해서 되뇌이어도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오후에 담배 생각이 나서 밖에 서성이며 복합적인 욕망으로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담배를 피고 싶지는 않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담배 생각이 간절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냥 갑자기 마음 속으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 양 ~~ 등등 마음 속에서 생각나는 찬송가들을 부르다 보니 담배 생각이 싹 없어졌다. 그후로 몇 달 동안 계속 이렇게 담배의 유혹을 물리쳤다. 이것이었다. 내가 담배를 완전히 끊고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담배를 입에 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삶이 찬송이 되고 찬송이 삶이 되었던 기쁨이 담배의 유혹을 이겨내도록 했던 것이었다.

 

우리가 입술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은 언어를 가진 인간으로서 너무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입술에 의한 찬양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드리는 찬양 또한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우리의 속을 주관하여 변혁시키고 마침내 삶의 모든 시간에서 열매를 맺음으로써 그 열매가 곧 찬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크리스찬은 찬양대에 서 있는 찬양대원이다. 입술을 열어서 그리고 삶의 향기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찬양대원이다. 그리고 마침내 찬양드리는 기쁨을 누리는 찬양대원이다. 혼자서 찬양드릴 수도 있고 여럿이서 함께 찬양드릴 수도 있고 수백, 수천 명이 함께 찬양드릴 수도 있는 찬양대의 귀한 일원이다.

 

순종으로 드리는 찬양은 기쁨과 위로와 감사와 능력을 낳고 이를 통해 입술로 터져 나오는 찬양은 온 땅에 울려 퍼질 것이다. 우리 주님 안에서 말과 생각과 삶이 하나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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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7. 9. 11:34

참된 겸손과 꾸며낸 겸손

 

우리 주님의 행적과 말씀들을 기록한 복음서들을 보면 우리 주님은 참 겸손하신 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천동지할 기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베푸시면서도 한번도 ‘나’를 내세우지 않으셨고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자랑해야 하는 경우에는 하나님 아버지만을 자랑하셨다. 우리 주님의 겸손하심은 요한복음 17 장과 빌립보서 2 장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 주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빌 2:6~8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겸손하신 주님은 스스로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겸손을 배워야 한다.

 

겸손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비유가 있다. 누가복음 14:7~11 말씀에 기록된 비유를 보면,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다.

 

이 비유에는 세 명의 사람이 나온다. 혼인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대한 주인과 초대를 받은 두 사람이다. 초대를 받은 한 사람은 잔치의 주인과 상관 없이 자기 자신의 명예를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여 높은 자리를 택하여 앉았다. 이 사람은 아마도 사회적으로 높은 명예를 가지고 있든지,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높은 권력의 지도층 인사였을 것이다. 이 사람 스스로의 생각으로는 ‘내가 이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누가 봐도 당연한 것’이어서 당연하게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다 내려놓고 가장 낮은 자리에 가서 앉았다. 자기의 위치 정함을 친구인 주인에게 맡기는 처사였다. 잔치의 주인이 친구이기에, 자기가 어떤 사람이든 그 잔치에서는 잔치의 주인이 정해 주는 자리가 자기에게 맞는 자리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주인에게 맡겼던 것이다. 주인과 이 사람은 사랑과 우정의 관계 안에서 서로를 위해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은 이 사람을 벗이라고 부르며 주인이 정한 자리로 올라오라고 권면한다. 겸손이란 무조건적으로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의 관계 안에 있다는 전제가 성립되어 있고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서 나를 낮추는 것이 겸손인 것이다. 이 비유를 실제의 삶에 적용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겸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골로새서 2장에는 겸손에 대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골 2:18~23). 이 말씀에서의 ‘겸손’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기록된 ‘겸손’과는 다르다. 이 겸손은 ‘꾸며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겸손이다. 그렇다면 순수한 겸손과 꾸며낸 겸손은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 하고, 우리는 결코 꾸며낸 겸손을 경계해야 한다.

 

먼저 겸손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사전적 의미로는 겸손이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를 의미하는데,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이 윤리적 또는 도덕적 겸손을 의미해서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겸손해야 한다’는 식의 가르침이거나 또는 ‘사람은 겸손해야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뭔가 반대급부를 위해 취해야 할 필요사항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비유를 보면 알 수 있다. 누가복음의 비유에서 겸손은 주인과의 사랑 또는 우정의 관계에서 나온 자기 비하였다. 겸손한 손님은 주인을 생각해서 가장 끝자리에 앉았다. 주인의 처분에 맡긴다는 의미였다. 반면에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명예를 내세우며 자기 스스로 자리를 정해서 앉았다. 이 손님은 누구와도 상관 없이 자기는 이 정도의 자리를 앉는 것이 마땅하다는 듯이 앞자리를 택했다. 따라서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이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사랑하는 상대에게 자기에 대한 처분을 맡길 만큼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골로새서 2 장의 ‘꾸며낸 겸손’이란 무엇일까.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겸손과 함께 천사 숭배 또는 자의적 숭배가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우상 숭배의 근본은 사람의 자기 중심성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 중심적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냄새 맡지도 못하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우리의 신이다’ 하는 자기 중심적 결단이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중심적이면 결코 겸손할 수 없다. 다른 존재가 그 사람의 마음에 결코 들어올 수 없는데 어떻게 사랑의 관계에서 나오는 자기 비하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잘해야 꾸며낸 겸손만이 가능한 것이다. 뭔가 겸손한 것 같은데 참된 겸손이 아니라 일시적이거나 또는 자기 만족이나 또는 뭔가 이익을 위해서 겸손한 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겸손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겸손할 수 없는 것이다. 잠언 15장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5:33).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겸손이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것에 주의해서 생각해 보면, 겸손은 무조건적 자기 비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의 원래의 존재적 특성 자체가 사회적이기 때문이라서 사람은 자기 스스로 정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정의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을 본따서 만드셨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이 관계적 정의를 거부하고 자기 중심적인 정의를 취하였을 때에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결코 겸손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은 이제 참된 겸손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따라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사랑 안에서 이웃을 위해 스스로 자기 비하의 태도인 겸손이 가능해진 것이다. 다만 이제 문제는 이 가능성을 단지 가능성으로서 자기 존재 안에 가지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삶에서 그 가능성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의지는 사랑 안에서 쉽게 해결되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겸손한 마음은 기본적인 덕목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현대를 자기 PR의 시대라고 한다. 자기를 자랑하는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자기를 적극적으로 알려서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게 만들어야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자기 PR은 교만과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만든다. 자기 PR이 아주 조금만 지나쳐도 바로 교만이 되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소극적으로 하자니 자기 PR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를 ‘지혜롭게’ 내세우기 위한 자기계발서들을 서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사실 말이 자기 PR이지 실제로는 적당한 수준의 자기 자랑일 뿐이다. 자기의 잘난 것을 내세워서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기 바라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특성을 생각해 볼 때에 이러한 자기 PR도 어떻게 보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알아야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무작정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자기 PR조차도 우리가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겸손이 무엇인지 살펴본 바를 토대로 하여, 자기 PR이 자기 자랑이나 심지어 교만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지 살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단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또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단코 겸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겸손하지 않은 자기 PR은 아무리 부드럽게 포장했다고 해도 결국 교만일 뿐이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사람들에게 경고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육신에 남아 있는 옛습성 때문에 너무도 쉽게 ‘꾸며낸 겸손’의 덫에 빠질 수 있다. 그런데 꾸며낸 겸손일지라도 참된 겸손과 겉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쉽사리 분별하기 어렵고 따라서 스스로는 마치 잘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그만큼 위험한 것이다. 자기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고칠 기회는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겸손과 꾸며낸 겸손을 분별할 알아야 하고, 분별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아닌가에 있다. 그러므로 겸손은 거듭난 사람,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성령 충만함으로써 반드시 드러나는 미덕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우리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여기에서 멍에는 사랑의 멍에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사랑 안에서 겸손을 배우자. 사랑 안에서의 겸손은 우리 주님이 죽음을 통해 걸으셔야 했던 길을 우리도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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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7. 3. 05:37

하나님의 집의 그릇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 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 2:20~21)

 

어느덧 이 블로그를 시작한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고 여기에 올린 글도 100 개를 넘게 되었다. 그동안 열심을 냈던 적도 있고 좀 해이해졌던 적도 있어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여기까지 왔다. 사실 100 개가 넘었다고 해서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쨌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인해서 100 개의 글을 올렸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할 뿐이다. 지금까지의 블로그 활동에 대해 전반적인 정리와 함께 반성도 하고 앞으로의 방향도 좀 생각해 보았다.

 

요근래 들어서는 블로그 방문이 거의 다 검색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꾸준히 블로그를 방문해 주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검색을 통해서 이 블로그를 알게 되고 특정 글들만 읽는 형태로 방문하는 방문객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본 블로그를 시작할 때의 마음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서 어느 누군가 단 한 명에게라도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며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함께 나눌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이 목표는 바뀐 것 같지 않고 여전히 동일한 마음으로 글을 올린다. 가끔 댓글을 남겨주시는 분도 계셔서 그나마 글을 올리는 데 힘이 되곤 한다. 좀 더 많은 대화나 토론 및 소통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만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일이지만 작은 일일지라도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제대로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하는 고민을 하는데, 디모데후서의 말씀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말씀에서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 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다”고 한 개역개정본은 조금 오해할 여지를 주고 있다. 마치 금 그릇과 은 그릇은 귀하게 쓰는 그릇이고 나무 그릇과 질 그릇은 천하게 쓰는 그릇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고, 그래서 귀하게 쓰일려면 그릇 자체가 좋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말씀을 보면 그런 구분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큰 집에는 다양한 그릇들이 있지만 어느 그릇이든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귀하게 쓰인다는 것을 표현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사도 바울은 무엇을 의미하기 위해서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말을 사용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흔히 이 말을 금욕이나 명상과 연결시키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참고 억눌러서 자기의 욕심을 비워내고 잡념을 비워내서 아무런 헛된 생각을 갖지 않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개념을 가르치지 않는다. 헛된 욕심을 버리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욕심을 어떻게 버릴 것인가에 대한 개념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깨끗하게 하는 것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 채움으로써 깨끗해지는 것이다. 성결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나를 채우는 것이 바로 깨끗해지는 유일하고도 완전히 확실한 방법이다. 그 이외의 방법은 없다. 컵 안의 공기를 모두 없애기 위해 컵을 완전한 진공으로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컵에 물을 채우면 공기는 모두 빠져나간다.

 

출애굽기에는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 쓰임 받은 브살렐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셔서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셨다(출 35:31)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사도행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행 6:3)라는 말씀처럼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워져야 한다. 또한 에베소서의 말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셨으니 방탕하여 더러운 것에 대한 반대의 개념으로서 성령 충만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볼 때에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말씀은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깨끗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더럽다’에 대한 반대말로서 성경은 ‘거룩하다’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계 22:11)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깨끗하다’는 말은 ‘거룩하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다. 바로 성령 충만으로 옛 본성을 쳐서 이겨야 한다. 사람이 깨끗해지기 위해서 악한 생각을 억누르며 없애려고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깨끗해질 수가 없다. 사람의 본성이 자기 중심적이고 욕망을 유전자에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스스로 깨끗해질 수가 있겠는가. 유일한 방법은 본성 자체가 바뀌는 것 밖에는 없다. 그래서 사람이 깨끗해지려면 먼저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이제 그의 새로운 본성이 올바르게 활동하려면 성령 충만해야만 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이란 에베소서 5:18~21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말씀 충만이요 찬송 충만이고 감사 충만이며 겸손 충만이고 사랑 충만이다. 그래서 26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되는 것이다. 다만 성령 충만은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힘써서 성령 충만을 받으려고 노력해야 받게 되는 것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이 술 취하지 않고 방탕하지 않으려면 노력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듭난 사람이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노력해야 하며, 그것도 대충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오직 성령 충만을 바라며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으로 충만하기 위해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찬송과 감사로 충만하기 위해 늘 기도에 힘쓰며, 겸손과 사랑으로 충만하기 위해 항상 자신을 낮추며 다른 사람들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고 그들의 필요를 돌아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만큼 다른 사람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결국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의 영이 나를 온전히 주관하시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셔서 일꾼 삼으신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출신 성분이나 자신의 능력이나 그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음으로써 귀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가 이렇게 성령 충만한 상태가 되어야 언제 어디서 어떠한 방법으로 어느 사역에든 쓰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쓰임을 받으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마치 성령님이 하시는 것과 같은 향기가 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 충만, 곧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을 받는 시작점이므로, 누구라도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성령님으로 충만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 거듭난 성도가 사역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이 블로그 사역을 돌이켜 보건대, 내가 올린 글들이 과연 성령님의 향기가 나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글들인지 항상 고민해 왔다. 애초의 목적처럼 어느 누구 단 한 사람이라도 여기에 올려진 글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으며 하나님과 조금 더 친밀해지고 조금 더 동행하는 열매를 얻기를 늘 소망해 왔다. 그리고 또한 이 사역을 통해 나 역시 영적인 성장을 이루기를 소망해 왔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가운데 우리 주님만을 의지하여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말씀과 감사와 찬송과 사랑이 충만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며, 나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임하기를 기도하며……

이제 다시 새 힘을 내서 성령 충만 가운데 다음 글을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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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6. 30. 10:42

가라지 비유

 

마태복음 13장에는 여러가지 비유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가라지 비유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고,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가 보여서 그의 종들이 주인에게 가라지를 제거할까요 하고 물으니, 주인이 말하기를 둘 다 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하며 또한 추수할 때에 추수꾼들이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자기의 창고에 넣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비유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나서 다시 이 비유를 풀어서 설명까지 해주셨다. 좋은 씨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고,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며, 밭은 세상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사탄 마귀이고, 추수 때는 세상의 끝이며, 추수꾼은 천사들이어서, 세상의 끝에 예수님이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세상에서 불의한 자들을 거두어 내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을 의미하는 비유였다.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얼마나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시는지 잘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은 행여나 종들이 가라지를 뽑다가 실수라도 해서 곡식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전문 추수꾼들이 추수하기 전까지는 가라지를 그냥 그대로 두고 나중에 추수꾼들이 전문적으로 판별하여 아무런 실수 없이 가라지를 다 모아서 불에 태우도록 하시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의지에는 가라지를 위한 것이 전혀 없다. 오직 곡식만을 위해서 이러한 결정을 내리셨고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의지는 확고하고도 충만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거슬러 잘못을 저지른다.  그 잘못은 바로 하나님이 만류해 놓으신 종들의 행위를 우리가 조심성 없이 일반적으로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가라지가 곡식들에 많은 해를 입힌다. 곡식이 햇빛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 뿌리가 자라는 것을 방해하고 또 땅의 양분을 빼앗아 가는 등 여러가지 방식으로 곡식에 해를 입힌다. 그러나 주인이 보기에 그 해들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종들이 가라지를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곡식을 다치게 하거나 심지어 뽑아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이 종들을 말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교회 안에서 사람들과 너무도 쉽게 관계를 단절해 버리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게 한다. 우리는 추수꾼처럼 완전히 영적인 눈이 떠진 것이 아니기에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누가 가라지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가 가라지를 명확하게 판별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 ‘가라지’를 교회에서 쫓아내기까지 한다.

 

물론 교회에서도 가라지가 자라고 있다. 교회도 세상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에 가라지가 들어와서 자라는 것을 막을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그 주인과 같다고 한 것이다. 곡식을 위해서 그 안타까움과 조바심과 간절함을 주인이 감당하겠다는 것이다. 곡식이 가라지로부터 해를 입으면 상하게 되지만 그것까지도 주인이 감당해서 주인이 더 잘 돌보아 곡식이 열매 맺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 주인만을 위해서라면 가라지가 결코 자랄 수 없어야 하겠지만 곡식을 위해서 현재 세상에서는 가라지를 일정부분 허용해 주시고 곡식의 아픔을 함께 감당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어 곡식이 다 열매를 맺고 나면 가차없이 가라지를 쳐내서 묶어 불 속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에서 살 때에 이 비유의 말씀이 가르치는 요점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함부로 가라지를 구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둘째, 참으로 어쩔 수 없이 가라지를 분류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하나님께 요청하고 최대한 곡식을 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께서 가라지를 쳐내는 마지막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곡식에게 있으므로 가라지가 아무리 설치고 나댄다 하더라도 결코 곡식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래서 곡식은 어느 밭에 있든지 잘 자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에 우리는 지역교회가 하나의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도적 시스템 아래에서의 지역교회는 흥하다가도 문을 닫을 수 있고 또 언제라도 다시 문을 열 수도 있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없는 교회, 즉 참 성도로만 이루어진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성장하고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에 지역교회의 상태가 암울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지역교회가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고 정체되어 있고 심지어 망해 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곡식을 알고 계시며 추수 때에 거두어 곳간에 들여 놓으실 것이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동일시 된다.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직접적으로 충만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가라지에 집중하느라 ‘좋은 씨’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씨가 되는 기준은 단 하나이다. 열매를 많이 맺는 씨가 좋은 씨이다. 그런데 주인은 이미 좋은 씨를 알고 있으며 그 좋은 씨를 밭에 심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씨가 잘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있을까. 가라지의 방해와 기후와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잘 자라기도 하고 조금 힘든 적도 있겠지만 주인과 종들의 보살핌 아래 결국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주인에게 좋은 씨가 아닌 것은 없다. 주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씨는 다 좋은 씨이고 그 씨를 밭에 심었으니 마땅히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주인이 기대하는 것은 이처럼 좋은 씨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러니 행여나 좋은 씨가 열매 맺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 주인과 종들의 보살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은 필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가라지를 허용하시는 것이므로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가라지 ‘같은’ 사람을 발견했다고 해서 우리는 실망할 필요도 없고 우리가 나서서 가라지를 제거하기 위해 뭔가를 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가라지랑 한통속이 되어 가라지를 닮아가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가라지를 제거하는 일에 한해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추수꾼들이 궁극적으로 처리할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의 보살핌 아래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가라지의 방해를 이겨내고 항상 노력하며 열매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위해 노력하며 가라지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마지막 때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소망을 얻고 위로를 받아 굳건히 견디며 밝고 멋진 삶을 살아내는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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