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의 품꾼 비유
마태복음 20 장에 보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포도원의 품꾼 비유가 나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루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 포도원 주인과 같다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 비유는 바로 앞 장에 있는 사건, 즉 부자 청년과의 대화의 사건으로부터 이어져서 하나의 교훈을 극명하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우선 먼저 이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그런데 보다 더 중요한 점은 우리의 사고의 패러다임 개혁을 요청한다는 것에 있다. 즉, 요점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기 위해서 우리의 사고 방식의 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비유이다. 이런 결론이 내려지는 이유는 이 비유의 맨 마지막 구절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먼저 된 자는 먼저이고 나중 된 자는 나중인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역전될 수 있다는 말씀은 우리의 사고를 전적으로 개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및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이것은 부자 청년의 생각에서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의로움을 따라서, 즉 율법의 조항들을 문자적으로 지켜온 자기들의 업적과 성과를 근거로 해서,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과 달리, 자기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또 들어가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의로운 자기들은 불의한 세리나 죄인들과 결코 함께 자리에 앉아서도 안 된다고 여길 만큼 ‘자기 의 (self-righteousness)’를 내세웠다.
그러한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포도원의 품꾼 비유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서 노동을 한 사람들은 하루 종일 열심히 일했다는 업적이 있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내가 이만큼 실적을 쌓았다’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은 포도원 주인 앞에서 자기를 내세울 근거가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의는 자기의 노동 시간에 비례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과 자기들이 동일한 취급을 받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맨 먼저 와서 열심히 땀흘려 일한 자기들은 마땅히 더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받지 못하였으므로 오히려 빼았겼다는 생각, 곧 상대적 박탈감을 갖게 되었고 이 박탈감은 분노를 일으켰고 그 분노는 포도원 주인을 향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나를 저런 자들과 똑같이 취급했다’는 생각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차별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자기들이 더 받든지 아니면 나중에 온 모든 사람들이 덜 받든지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극히 세상적인 사고 방식은 포도원 주인의 행동에 의해 근본적인 도전을 받는다. 주인에게 있어서 정의는 모든 품꾼들에게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었다.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차별적으로 품꾼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품꾼들이 자기의 업적과 능력에 상관 없이 우선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이 주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만약에 포도원 주인에게 포도원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면 그는 아침 일찍 모든 필요한 품꾼을 다 모아서 포도원에 들여보내면 될 일이었다. 몇 번이나 장터에 가서 품꾼들을 더 부를 필요 없이 한번에 필요한 품꾼들을 불러서 하루의 작업을 다 마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주인은 개인의 성과 또는 일의 효율이 아니라 하루를 굶어야 하는 사람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그들을 가엽게 여기고 다시 장터에 나가서, 어쩌면 포도원 작업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품꾼으로 계속해서 고용했다. 이것은 사실 포도원 주인은 아무런 품꾼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결국 아침 일찍부터 일한 품꾼들 역시도 사실은 은혜를 입은 것이었다. 포도원 주인의 마음이 하루 하루 품삯을 벌어서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향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었던 것이지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 둘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서 그리고 포도원 주인의 은혜를 권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분노에 찬 항의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사고 방식은 세상적인 사고 방식과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는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의 성과를 통해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차별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은혜 중심적이며 그 은혜는 차별 없이 모두를 살리는 방식이다.
여기까지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이다. 이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살펴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은혜를 베푸는 나라 정도로만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깊이가 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불평하는 품꾼들에게 포도원 주인이 대답한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포도원 주인의 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만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많으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답게 사는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포도원 주인의 말을 인정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포도원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삶과 생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 부자 청년의 말투는 조심스러운 듯 했지만 자세는 당당했다. 자기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고, 그랬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는데 부족한 게 있을까요? 그러니 예수님이 보시기엔 어떠한가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가 온전하게 되고 싶으면 가서 네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모든 소유’에 있을 것이다. 부자 청년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한 말씀이었다. 그는 표면적이고 문자적인 율법을 지켰을 뿐, 율법의 정신 곧 하나님 나라의 법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은혜 베푸는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이 마음의 부자가 되는 지름길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자기 중심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다. 그와 반대되는 길은 자기 중심적인 시각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은혜로 인식하고 또 받은 은혜를 기초로해서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우리는 생각과 삶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특별히 뭔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더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의 개혁은 많은 훈련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것은 머리 속에서는 한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삶에서는 무수한 훈련을 통해서만 마음에 심어지고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심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받아주심을 우리가 제대로 올바르게 하나님의 은혜로 인식하고 그 받아주심을 토대로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변화되어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무시하게 한다. 그 주인을 대하는 품꾼들의 태도와 말에서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은 오직 하나님 중심적인 사고를 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며,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인식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자기의 성과를 내세우며 정작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가 받을 것만을 셈하는 상태에 빠지며, 성과를 통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우열을 가리고 차별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저런 사람과는 다릅니다 하고 자신을 내세우지만 이것은 은혜를 무시하고 은혜를 베푸신 분을 무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정리해 보면, 사실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이미 정당한 대가를 요구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다. 철저히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부정하고 자신이 이룩한 아주 아주 아주 작은 성취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 대가를 요구하며 항의하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더욱 불행한 것은 사람은 그 어리석음조차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역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우물 속 개구리를 밖으로 꺼내주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개구리는 우물이 우주라고 생각하며 일평생을 그 안에서 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밖으로 꺼내어졌다면 밖의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살려면 우리는 생각과 삶의 패러다임을 철저히 개혁해서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다. 우리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하늘의 보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지식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하려고 할 뿐, 우리의 생각의 패러다임을 개혁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말씀의 씨앗이 길가에 떨어지거나 가시밭에 떨어져서 열매맺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서 열매맺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복받은 사람이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면 위선자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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