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0. 8. 7. 22:04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배워야 한다

 

1900년대 초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 이후로 백여 만에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엄청난 상황에 인류는 직면했다. 더욱이 이번 상황은 인류 역사상 노아의 홍수 다음에 처음으로 세상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저개발국이든 상관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확산되었고, 지금도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세계적으로 벌써 수천만 명이 감염되었고 수십만 명이 사망하였으며 오늘도 새로운 감염자와 사망자가 나오는 상황이다.

이렇게 엄중한 상황을 이해하고자 기독교계에서 저명한 분들이 자신의 생각을 이미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으며 또한 많은 목사님들 역시 자신들의 생각을 교회를 통해서나 인터넷을 통해서 나누고 있는데 (구글을 통해서 코로나 기독교또는 코로나 파이퍼 라이트 검색하면 다양한 글들을 찾을 있다), 이러한 글들이 때때로 서로 극단적인 대척점이 있는 경우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미 이렇게 많은 글들이 있지만 접근방향을 다르게 생각해 보고자 한다. 글은 상황의 원인이나 이유를 찾는 또는 어떻게 이겨낼까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상황에서 무엇을 배울 있을까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중국 우한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전파되기 시작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중국보다는 오히려 선진국이라 불리는 서구권 국가들에서 엄청난 속도로 퍼져서 수천만명이 감염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유럽과 미국이다. 이로 인해서 서구권 국가들의 경제는 엉망이 되었고 미국의 경우 2020 2분기에 -32% 성장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였다.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국가에서 지급하는 실업수당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으며 다른 수천만 명의 사람들은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몰라 노심초사하며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음을 두려워한다. 더욱이 이들 국가들과 호주, 캐나다, 남미 국가들 등은 소위 말하는 기독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들이며 전세계의 대부분의 기독교나 천주교 신자들이 국가들에서 거주한다. 그런데 이들 국가들에서 가장 많은 감염자와 사망자가 나온다. 8 현재 미국이 압도적으로 1위이며, 세상에서 가장 예수님 동상이 세워져 있는 브라질이 2위이다. 러시아가 3위이고 인구가 많은 인도가 뒤를 잇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염려하는 미국 방송사들이나 바이러스 전문가들은 한국을 방역의 기준으로 삼아서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켜서 바이러스 감염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매일 매일 소리높여 외치고 있으나, 미국에서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개인의 쾌락을 위해 별로 호응을 하지 않으며 또한 장년층에서도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루에 새로운 감염자가 7 명씩 증가하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나만 아니면 상관없다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며 산다.

실제로 어떤 분은 말하기를, 회사에서 마스크 쓰기를 의무화 한다면 회사를 그만두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고 하며 심지어 그러다가 죽으면 어떻게 거냐고 물어도 그냥 죽어도 된다고 하였다. 마스크를 쓰든 쓰든 그건 자기 개인의 자유인데 그것을 회사에서 또는 정부에서 강제하냐고 한다. 그리고 청년들은 금요일 오후가 되면 삼삼오오 모여서 이번 주말에 어느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며 즐기고 놀지 서로 낄낄대며 이야기한다. 심한 경우는 주정부의 마스크 쓰기와 외출 자제령을 거부하며 수백명씩 총을 들고 모여 데모를 하기도 하며, 동양인이나 흑인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며 대낮에 폭행을 가하기도 한다. 이렇게 사회가 불안해지자 총기류의 판매가 수십 퍼센트 증가했다는 뉴스가 나오며 이제는 백인 성인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과 동양인들도 총을 사는 비율이 엄청 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살펴보면, 서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기주의와 쾌락주의이다. 개인주의를 넘어서 개인이 마치 세상의 중심이 듯한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보이고 있다. 그들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쾌락이 가장 중요하며, 어느 누구도 그것을 침해해서는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유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에서는 자기 이익과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에 심지어 죽음에 이르도록 하여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라는 대통령이 이런 자세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배워야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독교 문화가 가장 왕성한 곳에서 이러한 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때까지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이기주의는 결코 기독교 정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베드로는 분명히 가르치기를,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자유로 악을 가리는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하였고, 또한 사도 바울 또한 고린도전서에서 가르치기를, 자신은 고기를 먹을 자유가 있으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유를 평생 동안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였고, 갈라디아서에서는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노릇 하라 율법은 이웃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5:13~15)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수천만 명이나 되는 미국에서 이러한 이기주의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전혀 주저함 없는 정도가 되었다는 것에 우리는 놀라지 않고 우리는 반성하며 회개하지 않는가. 우리의 눈은 도대체 어디를 향해 있단 말인가.

또한 백신이 아직 완성되기도 전에 미국과 영국과 일본이 백신 13억회 분량을 싹쓸어 갔다는 뉴스가 들린다. 가난한 나라들은 백신을 구입할 수조차 없게 만큼 부자 나라들이 백신을 입도선매 하고 있는데 그게 미국과 영국이다. 상대적으로 힘이 없고 가난한 나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다른 힘없는 나라들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백신을 구입하고자 한다는 소식이 들리는 상황에서도 미국은 많은 백신을 미리 찜해놓고자 수십조 원을 지출하며 다방면으로 힘을 쓰고 있으며 이미 전체 미국인이 백신을 두번씩 맞을 있을 만큼을 구입했다고 한다. 성경책을 손에 들고 나와서 TV 앞에 서는 대통령과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는 부통령이 최고 지도자인 미국에서 다른 힘없는 나라를 위한 배려는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우리 지도자들의 이러한 행위를 보면서 놀라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이러한 엄중한 상황이 6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는데도 상황으로부터 진지한 배움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엎드리자는 운동이 우리 기독교계에서 전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또한 무엇인가. 그저 항상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니 조금만 버티고 이겨내면 된다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오직 평안만을 선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다 왕국이 멸망할 즈음에 예레미야가 평안이 아니라 멸망을 선포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는가. 우리 기독교계의 덕망있는 분들이나 지도자들은 엄중한 사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평안만을 선포하는가. 인류 역사상 처음 겪는 상황에 대해서 지금까지는 너무도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워서 어쩔 몰라 했더라도 이렇게 6개월이 넘도록 이어지며 점점 심해지고 있다면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여쭙고 엎드려 기울여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캘리포니아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은 주정부의 교회 폐쇄 지침에 반발하여 벌써 주째 주일마다 교회문을 열고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며 하루도 중단할 없는 일이다. 그러나 교회 건물을 폐쇄하는 것과 교회를 폐쇄하는 것은 다르다. 교회 건물이야 폐쇄되고 허물어지고 심지어 다른 종교 시설로 팔릴 수도 있지만, 교회는 결코 폐쇄되지도 허물어질 수도 없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교회 건물이 폐쇄되어도 교회는 모여서 예배드릴 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안전하게 예배드릴 있다. 모두 같은 장소에 모여 서로 얼굴을 직접 마주하며 입을 모아 찬양드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성령님 안에서 영으로 모여 얼마든지 함께 예배드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 상황을 통해서 성도들이 교회 건물로 나와서 의무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서로 함께 영으로 하나 되어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시려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한국 교회의 실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국보다는 훨씬 좋은 상황일지라도 여전히 모두 마스크를 쓰고 생활해야 하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서 모임을 자제해야 하므로 예전처럼 얼굴을 마주보며 예배드릴 없는 실정은 미국 교회의 상황과 동일하다. 이는 아마도 전세계의 모든 지역 교회들이 동일하게 마주하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상황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만 것인가. 첫째, 우리는 먼저 진정한 자유를 배워야 한다. 세상 사회가 개인주의를 넘어서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기주의와 이기적 쾌락주의로 빠져드는 동안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조차 동화되었음을 깨닫고 회개하며 다시 주님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둘째,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세상에 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유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교회 안으로만 향해 있는 시선을 밖으로 돌려서 이웃을 위로하고 보듬어주며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셋째, 지도자를 구별할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4년전에 소위 바이블 벨트라고 불리는 미국 남부 지역들이 선택한 대통령이 지금은 어떠한 사람으로 드러났는지 생각해 보고 여기서 교훈을 얻어야 하며, 이제는 주님께 구하여 올바른 지도자를 구별할 아는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    

넷째, 모든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영으로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기쁨을 배워야 한다. 아직은 어리고 연약한 성도들을 포함해서 교회 공동체의 모든 성도들이 다함께 주님 안에서 영으로 하나 되는 기쁨을 배워야 한다. 하나 됨이 없는 상황에서 지금 소외된 지체들이 얼마나 헤매고 있을 것인지 우리는 가슴 아파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주님 안에서 영으로 하나 성도들이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 섬기며 서로 위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교회 공동체의 모든 성도들이 온라인으로라도 다함께 모일 없는 상황에서 소그룹으로 /오프라인으로 모여 서로의 안전을 배려하면서도 서로를 섬기며 위로하며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나누도록 해야 한다. 소그룹 모임이 활성화 되어서, 비록 교회 전체가 모이지는 못하더라도, 교회 안에서 작은 교회를 이루어 서로 섬기며 사랑하며 용기와 소망을 잃지 않도록 보듬어주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모든 배움들을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것은 우리 스스로의 반성과 회개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엎드려 우리의 지난 날들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회개가 먼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참다운 배움을 배울 수가 없다. 기껏해야 뭔가 흉내를 내다가 뿐이다. 진정한 회개가 있으면 성령님의 조명과 인도하심을 받을 있고 무엇을 배워야 할지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실 것이다.

모두들 팬데믹 상황이 언제나 끝날까 하며 그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땅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상황을 하루라도 짧게 해주시기만을 간구하고 있다. 상황은 언젠가는 분명히 끝난다. 비록 팬데믹 이전의 삶의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지라도 뉴노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국가들의 가치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들은 다시 얼굴을 마주하며 모여서 서로 함께 하는 방식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공동체 구성원들의 모임을 필수로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보화 기술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서로 얼굴을 대하며 함께 모여야만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질서는 영원히 유지될 것이다.

따라서 아직 팬데믹 상황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주님 안에서 겸손히 배우면서, 팬데믹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 삶의 근본적 변화이다. 편안한 현실에 안주하고 복음을 세상과 타협하여 적당히 하루하루를 넘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요청하시며 또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살기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주변에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있으면 그들을 돌봐주어야 한다. 바이러스에 희생된 사람이 있으면 가족들과 함께 슬퍼해야 한다. 진정한 회개는 이렇게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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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1:7~8)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살다보면 피할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난이다. 자기가 뭔가를 잘못해서 받는 벌이나 징계가 아니라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세상이 그를 싫어해서 그가 받게 되는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도 이미 말씀하신 바와 같다. 세상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그의 아들을 싫어하는데 어찌 하나님의 자녀들을 좋아하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 특히 신실한 일꾼은 고난받을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티가 난다. 하나님의 향기가 풍겨져 나오는 것이므로 세상이 모를 수가 없다. 향기의 농도에 따라 싫어하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싫어하므로 사람을 결코 좋아할 없는 것이고 어떻게 하든 사람을 망하게 하려고 온갖 술수와 모략과 고난과 어려움을 줘서 자기들 눈에서 보이게 하려고 한다. 자기들 눈에 보여야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잊을 있는 것이고 마치 자기들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세상이 주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받으라고 하면서 또한 12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능히 지키시리라고 한다. 말씀은 우리가 고난 자체가 없는 세상에서 살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고난을 받지만 하나님이 지켜주시며 우리 주님의 날까지 모든 고난에서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어떠한 물리적인, 육체적인, 경제적인, 또는 심지어 영적인 어려움이 당연히 있을 것이지만, 이러한 어려움이 우리를 멸망시키지는 못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신다. 세상에서의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 우리를 지키시는 것이다. 가령 십자가를 선포하다가 잡혀들어가서 고문을 당하면 육신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 고통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고통이 얼마나 것이든 상관없이 고통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지는 못하며, 고통이 나를 완전히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연약함의 범위 안에서 고통을 허락하신다. 더욱이 이런 정도의 고난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예비된 일꾼들에게만 허락하시는 고난이다.


우리 모두는 본능적으로 고난과 고통을 두려워한다. 살과 뼈를 가진 모든 사람은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심리적, 영적인 고난과 고통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며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킨다. 고난은 감추어진 축복이며 유익이다. 비록 고난의 과정 가운데서는 고통과 절망과 패배감이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며 고난의 과정을 우리에게 쓸모있는 것으로 바꾸신다. 진리는 로마서 5:3~4 말씀에서도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는데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환난이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게 하는데,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확증되는 소망이다.


이제 그러면 디모데후서 1:7~8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의 마음과 인격은 무엇인가. 우리는 언제나 단어들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인격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도 법칙이 아니다. 무조건적인 인과율의 법칙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말씀도 주문처럼 외우며 효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해서는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을 의지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자체가 어떤 법칙으로도 설명될 수가 없다. 선택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격의 본질인 완전한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를 선택해주신 것이다. 그런데 바로 동일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받으라고 하시며 우리가 고난받을 것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고난도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마지막 날까지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얼핏 보면 모순처럼 보이는 진리는 한가지를 이해하면 바로 해결된다. 그것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생각해 보라. 어려움과 시험과 역경이 없이 성장하는 경우가 과연 있는가 생각해 보라. 고난과 시험은 사람의 현재 위치를 알게 해준다. 그것은 사람을 낙담케도 하고 절망에 빠지게도 하며 심지어 패배자처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명확하게 사람의 현재 위치를 알게 한다. 높아진 사람은 낮은 처지에 처하게 하며, 낮아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찾도록 하고,  겸손과 절제를 배우게 하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탐구하게 한다. 자녀가 겸손하고 절제하며 아버지의 뜻을 살피고 뜻에 순종하는 것보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있으랴. 하물며 아버지가 하늘 아버지인 경우에는 얼마나 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더하여 복음에 순종하고 복음을 선포하며 받는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를 닮도록 성장하는 있어서 얼마나 좋은 훈련이 아니겠는가. 복음에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다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가르쳐주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얼마나 것이었는지 가르쳐주시길,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 아들까지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주셨을 만큼 사랑이었다고 선포한다. 독생자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순종으로 그리고 우리를 위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다. 독생자 아들의 이러한 사랑과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에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장시키는 유익이 숨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예비하신대로 주어질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며, 어떤 이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만큼 고난을 주시기도 것이다. 어떠한 고난이든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을 그리스도 안에서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아버지께 탄원하며 간구하고 아뢰어야 한다. 수많은 시편을 보라. 얼마나 많은 시편이 고난의 순간에 대한 탄원이며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하는 노래인가. 아버지는 결코 자신의 자녀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시며 항상 함께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것은 그저 우리들끼리 모여서 먹고 살려고 것이 아니다. 또는 세상과 무관하게 우리들끼리 따로 떨어져 살도록 하신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따라 증언하도록 보내어졌다. 이렇게 보내어진 삶은 세상이 싫어하므로 세상은 우리를 핍박할 것이지만, 우리는 핍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사람의 존재의 연약함 내에서 핍박과 고난을 허락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고난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양육하심의 사랑과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의지하며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순종한다. 특히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도 중에 하나이다.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이며 또한 세상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하도록 하신 것이다. 어떠한 두려움이 들지라도 하나님께서 두려움을 없애주실 것이며 우리와 동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날 것이다. 이로 인해 기뻐하고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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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 09:56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리스도와 동행하기 또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 등으로도 표현할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 있을까? 어떤 사람은 잠들기 전에 하나님,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말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 안녕히 주무셨어요?”라고 하며 마치 하나님께서 바로 옆에서 함께 거주하고 계시는 것처럼 대화하는 것을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생각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동거 성경이 가르쳐 주는 것일까?


그러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인식의 영역에서 어떻게 있으며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 것일까? 어떤 분처럼 마치 하나님께서 물리적으로 바로 옆에 계시는 것처럼 간주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 있는 것일까?


성경은 가르쳐 주시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결코 분리될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이름보다 뛰어나다고 노래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론적이나 개념적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온통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사람들로 가득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한가지 힌트를 주셨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안에라는 표현을 통해 주님과의 연합을 가르쳐 주셨으며 또한 15:7 말씀을 통해 힌트를 주셨다: “너희가 안에 거하고 말들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원하는 바를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 말씀에서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과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같은 의미라는 것을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보면, 말씀은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생명과 삶의 모든 근본이 된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된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산다면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이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처럼 산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아무런 생명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생명이 되고 삶이 되며 모든 것의 근본이 되지 않으면 나는 결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적당히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말씀이 활자화 것이 바로 성경이므로, 우선 먼저는 성경이 내게 생명이 되고 삶이 되며 모든 것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고 근본이 되는 삶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혼자 노력한다고 이룰 있는 것도 아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조명과 역사하심이 없으면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러한 삶을 수가 없다. 여기에서 믿음이 필요하며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육하시므로,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을 믿으며 성령님의 도움을 간구하면서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깨어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살피고 묵상하면서 노력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생명이 되고 삶이 된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따라서 내게도 기쁨이 넘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는 이제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생명이 되고 삶을 지배하여 이끌어가며 삶에서 열매 맺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대로 생각대로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삶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을 지배하여 이끌어갈 때에 나타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가난한 , 사회적 약자, 병든 , 슬퍼하는 , 상심하는 등등 어렵고 힘든 사람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러한 사람을 섬기고 돕는 것이요, 기회가 된다면 교회 울타리 너머 밖으로 뻗어나가 그러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 중에 소외되고 상심한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고 그러한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섬기는 것이며, 또한 현대에는 국가나 정부가 교회 밖의 약자를 위해 많은 제도들을 운영하고 있으므로 세금을 정직하게 내는 것이 교회 밖의 약자를 섬기는 가장 쉬운 한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국가는 세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국가나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찾아서 직간접적으로 섬기는 것도 귀한 사랑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모이기를 떠들썩하게 좋아하는 사람만 모여서 서로 먹고 즐거워 하는 것이나 많은 사람을 먼저 챙겨주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살펴서 교회에 나오지만 소외되거나 가난하여 모임에 끼지 못하고 불편한 사람을 섬기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삶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은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가족 중에 크리스찬이 아닐지라도 사랑하고 아끼며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한다. 크리스찬과 아닌 사람으로 나누어서 크리스찬은 사랑하고 아닌 사람은 멸시하는 삶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없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이므로 오히려 그를 더욱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언제 하나님께 돌아올지 누가 알겠는가. 만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 가족조차 크리스찬이 아니라고 해서 사랑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향기를 느낄 있을까. 자기 아내나 형제나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과연 진심으로 사랑할 있을까.


여기에서 한가지 조심해야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을 살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채우고 움직여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명하고 싶은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 사람은 너무도 쉽게 자신을 속일 있으며 또한 사탄도 사람에 대해 너무도 알고 있으며 속이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신념이나 열심을 바탕으로 해서 살기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믿고 먼저 방향으로 나아갈 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이웃 사랑에는 인내와 절제가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게 되며,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누리는 기쁨이 없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반드시 변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생명이 되고 삶이 되어 그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 맺는 삶으로 변하게 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알고 기뻐하며 누릴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함께 하심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삶을 너머 가족과 형제와 교회를, 그리고 교회 밖으로 넘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힘을 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보자.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루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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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 09:55

항상 기뻐하라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 기록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말씀에서 우리는 어떻게 항상 기뻐할 있을까 고민해야 한다.


기쁨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소극적 기쁨과 적극적 기쁨이다. 소극적 기쁨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고 베풀어주신 모든 복으로 인해 누리는 기쁨이다. 기쁨에는 우리가 내세울 것이 전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일방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기쁨이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기뻐하며 감사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감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에는 우리의 공로는 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인데, 베드로전서 1장의 말씀과 같이, 구원이 우리 안에서 말로 표현할 없는 기쁨을 누리게 한다.


반면에 적극적 기쁨은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기쁨을 나도 누리게 되는, 그런 기쁨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내가 기뻐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기쁨이 되는 것이며 기쁨은 영혼을 송두리째 감싸고 힘과 평안을 누리게 하는데, 이것은 마치 자녀가 아버지를 기쁘게 하여 칭찬받을 때에 누리는 기쁨과 같다. 물론 적극적 기쁨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이 아니면 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러한 기쁨에도 감사함이 필수적 요소이다. 다만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움직여서 열매 맺어야 되기에 적극적이라 하는 것뿐이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며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 우리는 때때로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내가 누리는 기쁨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 꿇고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적극적 기쁨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소극적 기쁨은 항상 있으므로 언제든지 가능하다. 심지어 우리가 잠시 넘어졌을 때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구원의 기쁨을 감사함으로 누릴 있고, 기쁨은 우리가 다시 회복되도록 이끌어준다. 이렇듯 소극적 기쁨은 우리의 삶에서 받침대 역할을 하며 또한 적극적 기쁨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기쁘게 있겠는가. 그러므로 소극적 기쁨을 날마다 누리는 상태에서 적극적 기쁨도 합쳐져서, 우리가 항상 기쁨을 천상의 수준으로 누리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면 생각해 보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인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하나님을 맘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삶에서 이루어내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의식이나 예식을 따라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처럼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기뻐하셨으며 아버지께서도 우리 주님을 사랑하셨고 기뻐하셨다. 이는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알며 이루셨기 때문이다. 순종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다.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비록 육신적 한계로 인해서 때로는 실수하고 실패할 수도 있지만 오직 성령님만을 의지하며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알고 이루려 힘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기쁨 안에서 내가 기쁨을 누리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내가 항상 극치의 수준으로 기뻐할 있는 이유이다.


기쁨은 누구도 빼앗아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내게 주실 있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바로 오늘 시각부터 하나님을 기쁘시게 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이웃을 몸처럼 사랑해 보자. 물론 이웃을 사랑할 때에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전해야 하며 성령님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옆에 있는 사람이 이웃은 아니기 때문이며, 사탄은 순진한 이웃처럼 가장하고 들어와 오히려 나를 넘어뜨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님만을 의지하며 가르침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있으리라.


아내와 가족을 먼저 몸처럼 사랑하자. 자기 아내와 가족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있으랴. 아내의 말을 들어주고 더욱 아껴주고 보호해 주고 모든 것을 다해 진심으로 인내하며 사랑하자.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때가 되면 가정의 테두리를 넘어서 다른 사람도 몸처럼 사랑할 있게 것이며 더욱 테두리로 나아가게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자. 주님의 자녀들이 모인 교회를 섬기며 사랑하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공통된 사명도 교회를 섬기며 사랑하라는 것이니 우리 주님을 대하듯 교회를 대하며 사랑하자. 각자에게 주신 은사대로 교회를 사랑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몸이 되고 몸으로 기능하도록 섬기자.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부어주시는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의 기쁨이 넘쳐나며 이웃에게로 흘러갈 것이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의 기쁨만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기뻐하며, 아버지를 기쁘게 하여 누리는 기쁨이 모두 포함되어야, 항상 기뻐하는 기쁨이 천상의 수준으로 높아져서 항상 기뻐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 맺은 조그만 순종이라도 아버지를 기쁘게 것이며 기쁨은 천배, 만배로 배가되어 내게로 내려올 것이고, 내게 순종을 향한 동력이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생각하며 항상 기뻐하자. 하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인도하시어 항상 기뻐하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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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우리 주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사탄에게 가지 시험을 받으셨고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다. 첫째는 사람이 빵으로만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것이니라 말씀이었고, 둘째는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섬기라 말씀이었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말씀이었다. 처음 말씀들은 이해하기가 쉬운데 반해, 마지막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그리고 말씀들이 중요할까? 먼저 말씀들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흔하게 겪는 시험들을 이겨낼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세가지 시험들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들을 대표하는 가장 흔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말씀들을 붙들고 의지해서 우리도 시험을 이겨내야 한다.


그런데 세가지 시험 중에서,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실수들 중에서, 우리 스스로도 알지 못하며 부지불식 간에 저지르는 실수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말씀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테스트해 보려고 한다는 의미를 나타낼 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양털에 이슬이 내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 대표적인 예가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하나님을 마치 맘대로 움직이려고 한다는 의미를 포함해야 적합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경제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삶은 항상 고단하며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있는 것인데, 사랑과 은혜를 우리는 때로 마치 우리의 권리인 것처럼 어리석게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신실하다는 성도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자기의 기도나 간구를 통해서 모든 일이 형통하게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마치 자기의 한마디면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시는 것처럼 자랑하기도 한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맘대로 움직일 있다고 생각하며, 말로는 하나님만이 하나님이며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말로 하나님을 움직이고 조종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몸이 많이 고통스러운 사람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치료를 간구할 것이다. 그러나 기도가 마치 하나님을 움직여 뜻대로 치료해 주시기를 요구/강요/강권하는 것이 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 사람의 몸의 고통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무작정 이루게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뜻만이 관철되어야 한다는 태도이며, 이면에는 자기 기도를 들어주면 여전히 하나님으로 섬기겠다는 마음인 것이다.


이것을 극복할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는 창조물이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면 단지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는 방법 뿐이다. 하나님께서 기도와 간구를 들어주시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이지 기도가 권위가 있거나 절대적인 영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나의 능력과 존재와 자격과 혈통 무엇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에 감사드리고 감격해야 한다. 벌레와 같고 먼지와 같은 나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잊지 말라.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나는 단지 창조물일 뿐이고 심지어 하나님께 반항하며 하나님을 거부했던 먼지에 불과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된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엎드릴 수가 없다. 내가 마치 뭐나 것처럼 착각하는 순간, 하나님은  멀리 계시며 나와는 상관없는 분이 것이기 때문이다.


철저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자. 하나님은 선하시며 사랑이 넘치시고 신실하신 분이므로 사랑 안에서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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