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4. 5. 19. 20:21

        성경에는, 특히 구약 성경에는, 지금 우리가 이해하기엔 어렵기만 한 말씀들이 종종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출애굽기,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에 기록되어 있는 가나안 진멸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실행에 대한 내용이며, ‘진멸’이라 함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축들까지 완전히 죽여 없애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지금’이라고 한 이유는 현대의 윤리적, 도덕적, 과학적, 철학적 등등의 배경을 가지고 이해하는 경우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성경 해석의 원칙은 문법적, 문맥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이다. 문법적 그리고 문맥적이라 함은 언어 그대로의 의미를 문법적이고 문맥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역사적이라 함은 기록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신학적이라 함은 성경 전체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성경 전체를 요약 정리한 것이 신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신학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다.

 

        신약 시대에 구약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자세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히브리서에 기록된 것처럼 (히 10:1), 구약 성경은 앞으로 올 것에 대한 그림자로서 이해해야 한다. 둘째는 로마서에 기록된 것처럼 (롬 15:4), 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구약 성경의 모든 기록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성경 해석의 원칙과 신약 성경이 가르쳐 주는 구약 성경에 대한 자세를 가지고 가나안 진멸 사건을 조명해 보자.

 

        가나안 정복에 대한 명령 그리고 실행은 출애굽기와 신명기 그리고 여호수아서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 3:8, 17; 6:4; 23:23; 33:2; 34:11; 신 7:1~2, 16, 23, 24; 20:17; 수 3:10; 6:21; 10:1, 28, 30) 이러한 가나안 정복 또는 진멸에 대한 기록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문제는 많은 토론들로 이어졌고 지금도 계속되는 문제이므로 본 글에서는 이 기록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 방식을 개괄하고 개혁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이 기록을 어떻게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고민해 보도록 한다.

 

        먼저 개혁주의 신학의 진영이 아닌 다른 진영에서 이 기록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개괄해 보면 크게 세 가지 정도로 구별된다. 첫째는 이 가나안 진멸에 대한 명령이 상징적인 명령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상징적으로 가나안 민족들을 진멸했었으며 결국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으나 과장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하였고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둘째는 이 명령에 대해 과거 희망적 표현이라는 해석으로, 이스라엘이 포로기 이후에 구약 성경을 집필하면서 포로기에 대한 반성으로서 그때 가나안 민족들을 진멸했어야 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것은 가나안 민족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따라 하나님을 배신하게 되었고 결국 멸망하게 되었으므로 그때에 그들을 진멸했더라면 이러한 멸망이 없었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셋째는 ‘진멸’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렘’은 실제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일반적인 전쟁 정도로 번역 또는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하나님은 실제로는 가나안 민족들을 진멸시키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다는 해석이다. 결국 이러한 해석들은 이 기록을 역사적 실제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으려 하며 그 근간에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의 하나님을 변호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이 기록을 어떻게 해석함으로써 이 기록이 실제 역사적 사건이며 또한 사랑의 하나님을 변호하는 것일까? 개혁주의 신학은 이 기록을 보다 더 큰 그림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즉, 노아의 홍수 심판 및 소돔과 고모라 사건 등과 같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연결하여 이해하려고 한다. 로마서 3:4~6 말씀을 참고하면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렇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종종 심판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전시(demonstration)되어 왔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신한 결과로서의 심판이다. 모든 사람은 첫 사람 아담이 사람의 대표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묶여 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아담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죄를 저지른다. 그래서 그 죄가 가득히 차면 심판이 내려진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며 소돔과 고모라 심판이다. 가나안 진멸 사건도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때문에 더욱 그렇다. 창세기 15:16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시기는 가나안 민족들의 죄가 가득 차는 때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죄가 가득 차는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졌다. 노아의 홍수 심판 때에도 이와 비슷했다. 창세기 6:5 말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던 것처럼 가나안 민족들의 죄가 가득 찼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사용하셔서 가나안 민족들을 심판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더욱이 개혁주의 진영은 가나안 진멸 사건을 종말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진멸 사건은 종말에 이루어질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표이자 모형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노아 시대에 있었던 홍수 심판처럼 – 이 사건이 종말적 사건이라는 것은 베드로후서 3:6~7 말씀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를 보면 알 수 있다 – 가나안 민족들을 진멸한 사건 역시 종말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은 세상 나라를 심판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모형적일지라도 그 의도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은 세상 나라를 완전히 씻어버려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나안 민족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며, 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엄중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개념적으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아마겟돈 전쟁이나 곡과 마곡 전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20세기에 언약 신학의 부흥을 이끌어 낸 학자인 메리디스 클라인은 이러한 사건을 “종말의 침입”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종말에 일어날 사건이 현재로 침입하여 전시되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하나님의 심판을 이처럼 모형적으로 때때로 전시하신 이유는 사람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3:4 말씀처럼 사람은 이 세상이 영원히 동일하게 이어질 것으로 믿고 있기에 하나님은 이 세상은 심판으로 끝날 것임을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게 전시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다.

 

        이 심판은 로마서 3:4~6 말씀에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라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더라도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불의에 대한 심판은 의로움 때문이며, 의로움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사랑은 의로움이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아주 당연한 일로 선포한다. 이것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진영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진영은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인 언약 신학을 배경으로 하여 성경 전체를 큰 그림으로 삼아 가나안 정복 및 진멸 사건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표이자 모형으로 이해하기에 ‘진멸’이라는 단어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또한 심판의 의로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명제를 변호한다. 의로움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나안 민족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 명령의 실행은 역사적으로 실제였으며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전 지구적으로 일어날 심판에 대해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게 전시하신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뿐만 아니라 장차 반드시 일어날 사건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신앙과 위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  (0) 2024.06.09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  (0) 2024.04.16
삼위일체의 의미  (0) 2024.04.11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0) 2023.04.20
잃었다가 찾아진 것에 대하여  (1) 2023.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