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2. 2. 8. 12:42

창세기 15장에 기록된 내용으로,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 체결식에 대한 기록은 한가지 의아한 점을 던지고 있다. 이 의식에는 소, 양, 염소, 그리고 비둘기가 사용되었는데, 소와 양과 염소는 그 중간이 둘로 쪼개어져서 서로 마주보도록 배열되었으나 비둘기는 전혀 쪼개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둘기도 쪼개어져야 했는데 아브라함이 자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애초부터 비둘기는 쪼개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아브라함의 잘못을 주장하며 그 증거로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 나라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해야 한다는 말씀을 제시한다. 아브라함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후손들이 종살이를 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는 점은 왜 집비둘기와 산비둘기가 필요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냥 비둘기 두 마리를 사용하지 않고 콕 집어서 집비둘기와 산비둘기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은 아마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해야 한다는 말씀에 대한 이유를 찾아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은 명백한 잘못이기에 그에 대한 벌로서 후손의 종살이가 선언되었다는 해석이 아니라, 후손의 종살이는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이므로 벌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다가 유일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다는 점밖에는 없어서 그렇게 해석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시라서 아브라함이 벌을 받게 되었다는 가정적 근거도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무엇이 올바른 해석인지 알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정말 아브라함의 잘못인지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이방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는 것이 아브라함의 잘못으로 인한 형벌인지에 대해 성경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

 

먼저 성경에는 이 언약을 체결하는 의식에 대해서 그 의미를 세세하게 설명한 기록이 없다. 이것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언약 체결 의식에 대한 공통적인 상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고대 근동 지역에서 행해지던 의식들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실제로 주전 2000 년 경에 국제적인 조약 또는 개인 간의 계약을 맺을 때에 행해지던 의식에 대한 성경 외적인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이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밝혀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히타이트 조약이다. 히타이트 대왕과 근처 지역의 왕 사이에 맺어진 조약에서 조약 체결 의식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기록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성경 외적 자료에 비둘기를 둘로 쪼개어 의식을 치르는 예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마크-앙드레 델라레이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 근동 지역인 수메르에서 조약 체결을 하는 의식에서 비둘기를 사용하는 예가 있다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시대의 수메르 지역인 갈대아 우르 출신이므로 이러한 조약 체결 의식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동물들을 사용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조약 체결 의식에 소나 양이나 염소처럼 죽이고 쪼개는 이유는 만일 조약을 위반하면 소나 양이나 염소처럼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의미를 전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큰 동물들과 함께 비둘기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비둘기를 소나 양처럼 죽이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비둘기를 살려두었다가 의식의 마지막에 비둘기를 날려보내 신전으로 가서 신에게 조약의 체결을 알리기 위한 용도였다. 신 앞에서 공증을 받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또한 고대 근동의 조약 체결 의식의 순서 중에 하나는 조약의 낭독 및 조약의 사본을 보관하는 일이었다. 조약을 공표하고 조약의 당사자들이 각자 자기의 신전에 조약의 사본을 보관하여 조약이 영원한 것이자 신의 공증을 받은 조약임을 천명하였다.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즉 죽이지 않은 이유가 고대 근동에서 조약을 체결할 때 비둘기를 사용한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비둘기를 신전으로 날려보낼 필요는 없었다. 고대 근동에서는 조약에 대한 공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신에게 조약 체결에 대해 알려했으나, 아브라함의 경우에 있어서는 언약의 당사자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비둘기들은 다른 의미를 가져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산비둘기와 집비둘기가 필요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즉, 신전으로 날려보낼 것이 아니라 세상에 공표하기 위하여 산으로 대표되는 자연과 집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에게 언약 체결에 대해 알리기 위해서, 즉 온 세상에 이 언약에 대해 공표하기 위해서 산비둘기와 집비둘기가 필요했다는 추측이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만을 지나갔다는 말씀과 고대 근동의 조약 체결 의식의 예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은 결코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도에 합당하게 언약 체결 의식을 준비했다. 참고할 만한 다른 기록은, 유대교 외경인 ‘아브라함의 묵시록’에는 아브라함이 비둘기들을 죽이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이는 비둘기들이 아브라함을 하늘로 데려가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방 나라에서 400 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이 기간이 400 년이어야 했던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가나안 땅에 죄악이 충만하여 심판의 때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려면 무조건 그들은 다른 장소에서 400 년 동안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그 다른 장소가 이방 나라인 이집트였어야 했고 그곳에는 이미 왕국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들이 이집트에서 빌붙어 사는 동안에는 학대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인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세상 왕국에서는 고통과 핍박과 환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만일 그들이 이집트로 대표되는 세상 왕국에서 잘 먹고 편안하게 잘 살고 있었다면 그들이 하나님 나라로 선택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 곧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이 아니라 이 세상의 나라에서 이방인의 통치를 받고 살면, 처음 얼마동안에는 괜찮을 수 있으나 결국에는 고통과 환난과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으며, 약속의 땅을 동경하며 그 땅에 들어가기를 소망하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도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와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마치 세례/침례를 받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건너간 것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종살이로부터 해방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종살이를 했던 것은 이러한 신학적인 의미를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던 것이지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다. 이러한 해석은 또한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시며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편견을 벗어나게 한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며, 따라서 구약의 하나님도 사랑과 은혜가 넘치시는 분이시다. 아브라함이 실수로 작은 잘못을 했다면 그 자리에서 고쳐주시면 될 일을 가지고 그의 후손들에게 수백 년 동안 종살이를 시키실 분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또한 후손들의 종살이가 형벌이라면 그들이 괴롭힘을 당할수록 더욱 더 번성하게 되었다(출 1:12)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자손의 수가 더욱 늘어났다는 것은 구약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큰 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이 아기 시절에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오게 된 것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해방된 것과 비교한 마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아브라함이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었다고 추론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던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더 성경적이며 또한 그 시대의 시대적 상황에도 더 잘 부합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는 해석은 별로 타당하지 않다고 하겠다. 그들의 종살이와 학대당함은 사탄의 세력 아래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받게 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기억하셔서 번성하게 하시고 견디게 하시며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내셨다. 따라서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라는 편견을 벗어버리고 구약의 하나님도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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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2. 1. 16. 00:13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우고 예수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님을 시험함이더라.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가장 나이 많은 사람으로 시작하여 마지막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던 여자만 남았더라. (요 8:2~9)

 

이 사건에는 네 명의 주체가 등장한다. 예수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간음한 여인, 그리고 군중. 이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이 가장 불쌍하게 여기신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대부분 간음하다가 잡혀서 끌려온 여인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가 살아났으니 가장 큰 현실적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가장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가장 큰 은혜를 받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은혜의 시작은 죄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데 가장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와 은혜를 구할 수 있지만,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지 않고 권리를 요구한다. 의인으로서 받을 대가를 요구한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의인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고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따라서 사람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간주하는 것일 뿐이지 진정한 의인은 아니기에 이것을 깨닫는 사람에게 은혜의 문이 열린다.

 

그런데 왜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깨닫게 되었을까. 인생의 날이 많으면 많을수록 죄도 많아지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하루를 더 산 만큼 죄를 더 범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빠져 있다. 사람의 본성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멀리하려고만 하기에 그렇다. 이 악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무시하고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악에 기대어 호흡하는 모든 순간이 다 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를 더 산 만큼 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는 있어도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수는 없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거부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어도 자기가 이런 상태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죄성의 무서움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전적으로 가능한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이러한 상태를 뚫고 들어오셔서 사람이 스스로를 성찰하도록 만드신다. 그때에야 사람은 자기가 죄인임을 일시적으로라도 알게 된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이러한 측면에서는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죄에 대한 인식이 영혼의 뿌리까지 내려가게 되면 그는 돌이켜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고 변하게 된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느낀 점 중에 하나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변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랜 시간 동안 생각이 굳어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새로운 생각이나 새로운 결심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는데 실제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경우가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청년 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들었다. 어쩌면 요즘 흔히 말하는 ‘꼰대’ 어른도 이러한 점을 지지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나이가 많을수록 양심에 찔리는 순간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으며, 따라서 청년에 비해서 나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기회가 더 많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더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이 많은 사람들은 쉽게 변화되지 않은 것인가 하는 점을 고민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 8장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새롭게 깨달은 점이다. 그동안에는 현상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은 거의 변화되지 않으므로 그들과의 성경공부나 영적 훈련은 별로 소용이 없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내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양심에 찔리는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믿음과 결합되지 않기에 그는 그 경험이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경우가 절대적으로 대부분이라서 그는 변화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그 경험이 그들의 믿음과 결합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살아온 세월 만큼 오랫 동안 그들이 보아온 한 상황 때문일 것이다. 그의 변화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는 아마도 처음에는 변화해 보려고 꽤 노력했을 것이지만 혼자서 잘 되지 않았을 것이고 몇 번 반복되다 보니, 나이 들고 이제는 패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양심에 찔리고 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래 봤자 결국에는 도루묵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변화를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러한 기회 자체에 대해서도 무디어져서 아주 잠시잠깐 그러려니 하다가 원래대로 돌아가고 마는 것은 아닐까 한다. 따라서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처방이 필요한데, 그것은 먼저 영적 지도자가 그의 처음 생각을 이끌어 최종적인 변화까지 끌고 나갈 수 있어야 하고 또 영적 공동체가 그의 변화를 함께 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결국 변화되지 못했으며, 그가 그러한 경험을 몇 번 거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패배주의적인 생각에 빠져서 어떠한 변화에도 소망을 잃고 말았던 것은 아닐까 하고 진단해 본다. 그리고 이 진단이 정확하다면, 영적 지도자와 영적 공동체라는 처방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영적 지도자와 영적 공동체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영적으로 하나 되어 서로 연결된 공동체이며, 또 그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성장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성령님의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대부분 어떤 은혜를 받고 새로운 결심을 할 때에 혼자서 해보려고 하는데 이런 상황을 깨트리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도록 하며, 또한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서로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각자의 영적 성장까지도 혼자이지만 함께 하는 성장이 되도록 서로 권면하고 자극을 받고 가르치고 배워서 공동체 안에서의 나로서 성장하게 된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고아로서 혼자 자란 아이와 사랑이 넘치는 대가족에서 자란 아이의 차이와 비슷할 것이다. 전적으로 혼자서 영적으로 성장하려고 하면 처음에는 뭔가 되는 것 같다가도 금새 포기하게 된다. 영적 성장은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 이루는 것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도 모르겠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누구나 막막하고 어렵다고만 느껴지기에 그렇게 된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영적 공동체와 영적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이 영적 공동체 안에서는, 양심에 찔린 것을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또한 변화되고 싶은 소망을 나누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모두가 성령님 안에서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예수님으로 옷 입고 있는 것처럼 또한 나는 너로 옷 입고 있고 너는 나로 옷 입고 있기에 나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고 너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므로 부끄럽지 않고 안타까움이 되며 서로 품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나 서로 고백하며 도움을 청하며 함께 성장하기를 소망한다. 성령님이 공동체 안에서 모든 모임들을 주관하시고 사랑의 끈으로 묶어주셔서 서로가 서로를 자신보다 먼저 생각하며 모두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자 한다.

 

이러한 영적 공동체 안에서 영적 지도자를 따라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순종하면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영적 공동체는 이러한 공동체여야 하고 영적 지도자는 이러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기도하며 살펴야 한다. 이러한 공동체가 아니면 결국은 아무런 소망이 없다. 교회에서 모이더라도 항상 혼자인 것과 마찬가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교회란 성도의 영적 연결과 모임인데, 교회로 모였으나 항상 혼자인 것과 같다는 말은… 이 모순을 깨트려야 소망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무엇보다도 먼저 제대로 된 영적 공동체를 이루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존하며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만드시는 사랑의 끈으로 묶여 있으려고 애를 써야 한다. 누구든지 먼저 시작할 수 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등을 따지지 말고 누구라도 먼저 이러한 영적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며 노력해야 한다. 나이 많은 사람은 결코 변화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사람의 잘못 이전에 우리의 잘못이다. 우리가 영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면 그 사람도 변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잘못 이전에 나의 잘못이다. 내가 먼저 영적 공동체를 이루려고 했더라면 우리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교회 전체가 변화되지는 않았더라도 성령님 안에서 영적 소통을 하며 영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러한 공동체를 향한 소망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이 소망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자. 기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항상 업드려 기도하며 간구해 보자. 하나님께서 새해에는 이루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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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2. 1. 6. 12:04

교회가 교회답다는 표지는 무엇일까. 우리가 교회에 속한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그리고 한국 교회가 이제 백 년도 훌쩍 넘겼지만, 과연 교회가 무엇인지 얼마나 알며 또 얼마나 교회다운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말만 많고 탈만 많은 집단으로 변해가는 교회를 지켜보면서 왜 교회가 이렇게 되었나 하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든 교회를 다시 세워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쉽지 않아 보인다. 교회에 모이는 사람의 수는 점점 더 줄어들고 더욱이 코로나 때문에 모이기 어려운 시기에 아예 교회를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이 더 늘어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교회가 세상의 다양한 공동체들, 회사나 동호회나 정치 집단이나 사회 모임 또는 사교 클럽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살펴보고 따라서 왜 교회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서 우리의 모습이 과연 성경적인지 성찰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한다. 물론 가장 다른 점은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세상의 공동체엔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어느 공동체에 그리스도가 계심과 안 계심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 차이가 없다면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그 둘이 다르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먼저 세상의 공동체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우리가 세상의 공동체에서 일원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요즘에는 심지어 가족 사이에서도 가치가 없는 가족은 거의 가족으로 취급되지 않을 정도이다. 능력이 됐든, 돈을 벌어 오든, 지식이 풍부하든, 인맥이 많든, 뭐든지 간에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는 가치를 증명해야 인정받고 공동체에서 살아남는다. 그렇지 않으면 떨쳐지거나 도태되고 투명인간으로 취급 받는다. 그래서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으로서,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서려고 한다. 문제가 생겨서 누군가를 잘라내야 한다면 나보다는 못한 다른 누군가를 잘라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거기에 시기와 질투가 더해지고 파당이 생기면 겉으로는 문제 없는 것처럼 보여도 속에서는 끝없는 투쟁의 연속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다. 그러면서도 선한 공동체이자 도덕적인 공동체로 보여지기 위해서 적절하게 호의를 용인함으로써 경쟁을 감춘다.

 

그러나 교회는 정반대이다. 교회는 가치가 없는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는 공동체이다. 만일 교회라고 하면서 능력 있고 돈 있고 뛰어난 사람만이 대접받고, 허물 있고 가난하며 그저그런 사람은 따돌림을 당하는 공동체라면 그것은 결코 교회가 아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고전 12:20~25).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고전 1:27~29).

 

그러므로 허물 많고 연약하며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들, 곧 부패하고 더럽고 천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어서 모인 공동체가 교회이며, 따라서 아무도 자랑할 수 없고 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하여 우쭐댈 수 없으며, 자기보다 못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거든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 더욱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더욱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인 줄 알고 그와 더불어 더욱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라고 하면서 어떻게 했는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나타나면 은근히 따돌리고 상대해 주지 않으며 ‘저런 사람이 왜 교회에 왔는지 모르겠어’라는 핀잔을 주지 않았던가. 교회는 오히려 그런 사람의 모임인데 거꾸로 그런 사람을 쫓아내려고 압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던가.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낸 내용 중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롬  15:5~7).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조건도 없다. 그저 서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가 영적 공동체인 이유는 육신과 물질을 따라서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성령님을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여 하나 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는 육신을 따라서 판단하지 않는다. 영의 새로움을 따라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육신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서로 소통할 때에는 성령님 아래 하나가 되어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며 서로서로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비록 육신으로는 여전히 허물 많고 부패한 상태이며 삐죽삐죽 악한 생각들이 드러나지만 이 육신을 뛰어넘는 영적 연결이 이루어졌으므로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며 함께 미래를 꿈꾸게 된다. 이 육신을 완전히 소멸하고 영적 교제가 완전해지는 그날을 소망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는 우리의 약함과 천함과 미련함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 자랑할 것이 아니므로 굳이 떠들고 다닐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엄청난 비밀이라고 되는 것처럼 꽁꽁 숨길 필요도 없다. 우리 교회는 우리의 그런 것들을 서로 용납하면서도 평안을 누리는 공동체이다. 다만 실제 지역 교회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사탄의 종자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약함을 고백할 때에 주의하며 지혜롭게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 언제 어느 모임에서 누구와 교제를 나누며 이런 고백을 해도 되는지 알 수 있다. 성령님께서 그 모임에 함께 하시며 우리 모두를 연결해 주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백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이 세상의 공동체에서 갈등은 필연이다. 우리 모두가 자기중심적인 주장과 가치 체계를 가지고 서로를 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 공동체인 교회에서 갈등은 더 이상 필연이 아니다. 영적 생명으로 연결된 공동체에서는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아니라 타인중심적인 사고가 먼저 오기 때문이다. 나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살피는 사랑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동체를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 안에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어야 한다. 우리의 육신을 따라서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으로 포용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이것은 쉽지가 않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 까닭이다. 성령님을 따라서 속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눈을 따라서 겉모습만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우리의 주관적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는 삶을 평생동안 살아왔는데 어느 한 순간 순식간에 바뀔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부터 깨뜨려야 한다. 계속해서 훈련해서 성령님을 따라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볼 때에도 겉모습의 추악함을 따라서 절망하지 않고 속사람을 발견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의 새로움을 따라서 소망을 가져야 한다. 이게 먼저다. 그래서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나와 같은 사람도 받아주셔서 새롭게 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베푸셨음을 깨닫고, 이제 다른 사람을 볼 때에도 그의 속사람을 발견하려고 해야 한다. 겉사람은 나나 그나 모두 허물 많고 어리석고 추할 뿐이지만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고 새사람이 되었으니 새사람으로 인정하고 새사람을 발견하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새사람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심으로 묶여진 공동체임을 증명해야 영적인 공동체이다.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공동체이다. 허물과 못남으로 인한 그 어떤 두려움도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영적 성장이 가능한 공동체이다. ‘행여 저 사람이 나를 판단해서 더러운 사람이라고 낙인 찍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이 없고, 서로의 추함을 오히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기회로 여기는 공동체이다.

 

새해에는 교회다운 교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 자신부터 바뀌어서 이런 공동체를 꿈꾸고 싶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성령님의 능력과 인도하심과 하나 되게 하심이 분명하므로 순종을 배우며 이 길을 가보고 싶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의 그림자의 어두움이 아니라 빛의 밝음을 따라서 나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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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뒤돌아 본다는 것은 때로는 고통이고 때로는 추억이며 또 때로는 소망을 갖게 한다. 지난 한 해 동안 나의 삶은 어떠했는가,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았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했는가, 나는 어떤 열매를 얻었는가 하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생기는 연말이다.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이 모두들 코로나 팬데믹 기간일지라도 직장 일과 가정의 다양한 일들과 교회 생활과 친척/친구들로 바쁘게 한 해를 지내며 때로는 잘 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실수하기도 하면서 지냈을 것이다.

 

신구약 성경 1독을 끝내면서, 성경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의 결론은 더욱 뚜렷해지는 것 같다. 나는 얼마나 아는가가 아니라 아는 만큼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결론이다. 나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지 못하면/않으면 그것은 빈 껍데기일 뿐이고 열매 맺지 못하는 죽은 나무일 뿐이다. 겉을 전문적이고 어려운 말로 포장하며 아무리 훌륭해 보이거나 심지어 아름답게 보이더라도 거품일 뿐이며 모래 위에 지은 집일 뿐이다. 잠시동안은 혹 할 수 있지만 결코 오래 갈 수 없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이걸로도 만족했던 때가 있었을 것 같다. 겉모습이라도 이렇게 변화한 것에 스스로 대견해 하면서 이 정도면 멋지구나 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리고 삶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껍데기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다만 무시하고 있을 뿐. 우리의 연약함을 핑계로 해서 껍데기에 안주하고 있을 뿐.

 

성경 말씀 어느 곳을 보아도 삶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드물게 교리만을 설명하는 곳이 몇 군데 있지만 모든 곳에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 말씀을 자꾸만 교리책처럼 읽으려 한다. 그러면서 도덕책이나 윤리책을 읽듯이 일단은 알아두고 실행하는 것은 나의 상태나 상황과 유불리를 따져서 적당히 실행하면 되는 것처럼 읽으려 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그렇게 읽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 때문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 대로 살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냥 읽는 것으로 끝날 수 없게 하신다. 우리가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을 때에는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대견하게 느껴지겠지만 조금이라도 성장했으면 이제 읽은 대로 살아야 한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많은 갈증과 답답함을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특히나 신앙 생활을 오래 동안 해 온 분들이 그렇게 느낄 것이다. 뭔가 막힌 듯한 느낌으로 인해서 봉사도 하고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하는데 그래도 갈증과 답답함이 풀리지 않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르지 못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죄를 범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알면서는 죄를 범하면 안 된다는 것을 삶에서 구현해 내지 못하고 살면 (믿음으로 하지 않은 모든 것이 다 죄이다) 죄책감 이후에 갈증과 답답함이 나타난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유대 땅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철저히 회개하면서 다시는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위선자가 되어 있었다. 성경 말씀을 교리책으로 만들어 지키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들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성경 말씀을 주석하고 또 주석을 다시 주석하면서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에 노력을 더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교리라는 틀에 담기면서 그들은 삶이 아니라 교리를 앞세웠고 위선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삶에 담겨야 할 성경 말씀이 교리에 담겨졌으니 위선은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 역시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유대인들이 걸었던 길을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것이다. 성경 말씀에 대해 아는 것은 무척이나 많은데 그것을 교리에는 담으면서 삶에서는 담지 않는 어리석음을 우리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열매를 맺었을 때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우리가 삶 가운데 결정해야 할 모든 선택들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선택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선택도 흐지부지 어영부영 대강 느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늘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선택을 하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은 매순간 어떤 선택을 내리는가와 동일한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합당한 삶은 곧 늘 깨어 있어서 하나님께 합당산 선택들로 이루어진 삶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늘 함께 하시는 길이다.

 

내년을 기다리면서 이제는 삶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싶다는 소망을 갖는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는 삶이 되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성경은 삶에 대해 말씀하시며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교리나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결론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모든 재산을 다 기부하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도 다 각각이며 우리의 삶의 정황도 다 각각 다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이것은 우리의 가운데 모든 선택들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매순간의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것이 되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지할 수 있을 만큼 깨어 있어야 한다. 또 한 해가 갔으니 그만큼 우리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졌다. 그날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삶을 살아 내기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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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본질적 중요성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하니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창 25:33~34)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히 12:16)

 

어느덧 많이 추워졌습니다. 감기나 코로나 등 건강에 더욱 조심해야 할 시기입니다. 이번에는 창세기 25:27~34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모든 것의 본질적 중요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얽혀있습니다. 어떤 사물이나 존재들뿐만 아니라 아주 다양한 일들 속에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게 중요한 건가?’ 하는 물음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특히 뭔가에 바쁜데 다른 어떤 것이 도중에 끼어들거나, 또는 여러 선택지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런 기억이 납니다. 좀 오래된 이야기인데, 모처럼 제 아내와 영화도 보고 외식을 하며 데이트하려고 막 나가려는데 장모님한테 연락이 와서 뭘 좀 도와달라고 했던 경우입니다. 이제 막 데이트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갑자기 무엇이 끼어들어서 순간 당황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나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결정을 어떻게 내리나요? 그냥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서 또는 나에게 더 이익이 되겠다는 생각에 따라서 또는 나를 즐겁게 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서일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에서도 바로 그 문제가 제기되는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사건에 직접적으로 들어가기 앞서 먼저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의 가정에서 일어납니다. 이 가족은 이전 설교에서 살펴본 내용대로, 이삭, 리브가, 첫째 아들 에서, 그리고 막내 야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그리 화목해 보이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특정 자녀만 더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장자인 에서는 주로 밖으로 돌고, 어머니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막내 야곱은 어머니 곁에 주로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네 가정들도 비슷하겠지요. 가족들 사이에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 경우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이 갈라지면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속으로는 애정결핍으로 인해서 정서적 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다른 형제에 대해 시기와 질투를 느끼게 가능성이 큽니다.

 

흔히들 열 손가락 중에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냐고 말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는 은연 중에라도 어느 한 자녀만 편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곱이 태어날 때부터 좀 약삭빠른 성정을 가지고 태어나긴 했지만 에서에 대해 시기와 질투가 많았던 것은 이러한 가정 환경도 큰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자녀들이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면, 혹시 자녀에 대한 부모 모두의 사랑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닌지 보시고 또 충분하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오늘은 집에 돌아가셔서 자녀들 모두를 하나씩 안아주시며 사랑한다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지 않지만, 애정결핍을 겪었던 아이는 하나님의 사랑도 쉽게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4 에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모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러한 가정 환경에서 어느날 한 가지 사건, 즉 모든 것의 중요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에서가 사냥에 나갔다가 육신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지쳐서 집에 돌아왔는데 야곱이 죽을 요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에서의 눈에 그 죽이 얼마나 맛있게 보였겠습니까. 몸도 지치고 배도 고프고 좀 쉬고 싶은데 빨리 배를 좀 채우고 편안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야곱이 만들고 있는 죽은 에서에게 지금 현재 가장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는 그 죽을 달라고 야곱에게 부탁했는데, 약삭빠른 야곱은 이때 하나의 기회를 보았습니다. 더욱이 리브가를 통해 계시된 말씀, 즉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는 말씀을 마음에 품고 있던 야곱에게 이 기회는 천금과 같은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이 가지고 있는 장자로서의 자리가 탐이 났던 야곱은 그 죽과 장자권을 교환하자고 거래를 제안합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아주 수지맞는 거래였습니다. 따라서 에서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응해서는 안 되는 거래였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그 거래를 받아들여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주전 2000년 경에 장자권이란, 일반적으로 첫째는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이 될 권리, 둘째는 가문의 제사장이 되는 권리, 그리고 유산 상속의 우선권 등을 의미했습니다. 이에 더하여 이삭에게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져 온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축복의 상속권이 있었기에, 그 장자권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장자권은 그냥 포기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축복의 상속권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에서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가볍게 여겼으니, 결국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무시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약속도 축복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가문에서 첫째가 되고 싶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좋은 것은 다 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꾀를 내어 에서가 가장 약해져 있던 상황에 기회를 잡았습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꾀를 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죽 한 그릇과 장자권은 서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므로,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넘기라는 거래 자체를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열망, 즉 첫째가 되고 싶고 모든 좋은 것을 다 받고 싶다는 열망으로 인해서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꾀를 냈습니다. 비록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향한 열망에서 이런 꾀를 내었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야곱이 잘 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야곱의 이 약삭빠르고 시기, 질투 많은 성격은 그후에 많은 고난을 통해서 고쳐지고 결정적으로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매달리는 과정에서 하나님 앞에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제안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장자권을 내어줍니다. 아마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는 게 먼저이지 죽고 나서는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일단 살고 봐야지’ 하고 말입니다. 그는 사실 대강 30분 정도를 참지 못했던 것입니다. 맛있는 죽 냄새를 맡았으니 얼마나 먹고 싶었겠습니까마는 30분 정도만 참으면 얼마든지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장자권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에 대해 평가하면서, 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망령된 자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망령된 자란 ‘불경스런’, ‘세속적인’, ‘사악한’ 등의 의미를 뜻합니다. 에서가 하나님을 무시했다는 의미입니다.

 

에서는 왜 장자권을 가볍게 생각했을까요? 그 상황에서 에서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빠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여기에서 핵심은, 무엇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의 주제처럼, 어떤 일이나 사물의 중요성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준이 바로 서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기준이 없으면 그냥 기분에 따라서 또는 내 이익에 따라서 또는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그 기준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눈치채고 있겠지만, 장자권이 중요한 이유는 장자권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축복이 들어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가문의 대표가 되는 권리나 유산을 더 받는 권리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나 사물이나 존재나 무엇이든 그것이 중요한지 아닌지 결정하는 기준은 그것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또한 우리의 구원자 되시므로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라도 중요한 것이 될 수밖에 없고,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결코 중요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준입니다. 어떤 일이나 사물이나 존재나 무엇이든 그것의 중요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기준은 현재 우리의 세계에서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똑 같은 시계라 할지라도 대통령이 하사한 시계는 훨씬 더 귀중하고 소중한 시계가 됩니다. 몇 년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영국의 아주 유명한 축구 감독이 씹던 껌이 아주 비싼 가격에 경매에 올라왔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씹던 바로 그 동일한 껌, 즉 하나에 1 달러도 하지 않는 것인데 그 세계적인 감독이 은퇴 경기에서 씹던 껌이었기 때문에 수십 만 달러 짜리 비싼 껌이 된 것입니다. 시계나 껌 같이 흔한 것이라도 대통령이나 세계적인 축구 감독과 관계 되면 이렇게 중요해집니다. 하물며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관계 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해질까요?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부모의 애정이 자녀들에게 엇갈리는 문제로 조금은 삐그덕대는 이삭의 가정에서 야곱과 에서가 자라고 있는 도중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에서 에서의 행동은 분명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장자권의 본질적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으며 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그는 결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의 중요성을 어떻게 결정하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따져 보십니까 아니면 지금 당장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지를 먼저 따져 보십니까? 아마도 우리는 그동안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닌가를 최우선적으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바뀌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나 사물 또는 존재 등, 모든 것의 중요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비록 내게 이익을 줄지라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과감히 버려야 하고, 내게 손해를 줄지라도 하나님이 귀하게 생각하시는 것이라면 과감히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이웃을 귀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모든 것을 우리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이렇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들과 함께 하도록 바뀌게 됩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이렇게 바뀌도록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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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으라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꽤나 자주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공관복음서들에 10번 정도 기록이 나온다. 예를 들어 마 24:42 말씀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4:2 말씀으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깨어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되도록이면 잠을 적게 자고 활동하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깨어 있는 것과 반대되는 말, 즉 아마도 잠을 자거나 또는 술취해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잠을 자거나 술취해 있는 상태에서는 첫째, 나의 주변에서 또는 내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둘째, 내가 능동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셋째, 내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다. 마지막으로는, 나의 활동을 통해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따라서 잠을 자거나 술취해 있는 동안에는 나는 살아 있으나 산 게 아닌 상태와 비슷한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나 자신이나 주변의 상황에 대해 능동적인 결정을 통해서 열매맺는 삶을 살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더 나은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The image of Triune God)을 따라서 창조되었다. 이것을 래리 크랩(Larry Crabb)에 따라서 기능적으로 정리하면 사람은 하나님에 의존적이어서 깊이 갈망하는 인격적인 존재, 사고하는 이성적인 존재, 선택하는 의지적인 존재, 그리고 느끼는 감정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이 모든 기능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태가 바로 깨어 있는 상태이므로, 주님의 명령, 깨어 있으라는 명령은 이 기능들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능들 중에서 인격적인 존재와 이성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특별히 선택하는 의지적인 존재로서 능동적인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것은 의지적으로 기능할 때에야 활동이 가능하며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선택이라는 것은 목표에 대한 선택과 행동 결정에 대한 선택으로 세분화될 수 있으므로 이 기능이 활성화 되려면 먼저 목표를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나의 삶의 목표를 명확히 인식하고 한순간도 그 목표를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 개혁주의 기독교는 사람의 제1 목표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은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며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지적인 존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거나 이 기능에 대한 민감도가 떨어지면 마치 잠을 자거나 술취한 상태처럼 살기는 사는데 그냥 살고 있는 것처럼 시간만 보내게 된다. 예를 들어,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에 드라마를 보면서 쉬는 상태를 가정해 보자. 어떤 사람은 저녁에 드라마를 보는 이유가 ‘그냥 별로 할 일이 없어서 그냥’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서 정신적인 피로를 풀고 쉬기 위해서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드라마에 빠져 지내는 것이 아닌 한 드라마를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냥’ 드라마를 본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의식이 없고 드라마를 보면서 그냥 시간만 보낸 것이다. 물론 드라마를 보면서 쉬는 효과를 누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 쉼을 통해 정신적인 피로를 풀어주기는 했지만 자기가 한 존재로서 능동적인 선택이 아니라 끌려간 상태였기에 자존감이 무너진 상태에서의 쉼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자존감을 갖고서 능동적으로 쉬었기에 정신적인 쉼뿐만 아니라 뿌듯한 쉼을 누림으로써 자기를 더 사랑하게 된다. 여기서의 자기 사랑은 나쁜 의미가 아니다. 자기 중심적이거나 교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아주 간단한 것에서조차 우리는 의지적인 존재로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게다가 목표에 부합된 행동 선택은 우리의 자존감을 더욱 증진시킨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주님의 명령인 “깨어 있으라”에 적용해서 생각해 보면, 우리의 목표를 명확히 하여 우리가 숨쉬는 것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 한다는 것을 인지하며 저녁에 드라마를 보며 쉬는 것을 의지적으로 선택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서 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자존감을 증진시키며 깨어 있으면서도 쉼을 누리게 된다.

 

또한 우리가 감성적인 존재로서 나 안에서의 사건이나 나 밖에서의 사건으로 인해서 감정이 발생했을 때에 그 감정을 인식하고 느끼며 처리할 때에 그저 감정을 배설하여 무시하거나 또는 감정으로부터 도피하여 감정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이 또한 깨어 있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창조 때부터 감성적인 존재로서 감정에 정직하게 반응하도록 창조되었는데 감정을 무시하거나 감정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우리가 감성적인 존재임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유쾌한 감정이든 불쾌한 감정이든 그 감정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가 발생하는 방향으로 감정을 처리하면 이 또한 깨어 있지 못하는 것이다. 깨어 있어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을 멀리하는 결과는 감정을 정직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이거나 감정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며 굴복당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명령인 깨어 있으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의지적인 선택과 감정의 처리에 있어서 능동적이고 지혜롭게 처신하여야 한다. 따라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존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선택하며, 나의 내적 또는 외적 사건으로 인해 발생하는 감정에 정직하게 마주하고 지혜롭게 처리함으로써 감정이 나를 굴복시키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게 되고 또한 관계들 사이에서 휘둘리지 않게 되며 항상 깨어 있게 되고 시간을 아끼게 되며 목표에 두 눈을 고정하고 항상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깊이 생각해 보자.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어디에 있는지 깊이 고찰해 보고 오늘부터라도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을 채워 보도록 훈련을 해 보자. 나의 행동이 그냥 결정되고 아무런 선택감과 목표 없이 행해지도록 두지 말고 뚜렷한 목표 아래 의지적인 선택을 통해서 실행되도록 하고, 거기에 따라서 발생하는 어떠한 감정이라도 정직하게 느끼고 지혜롭게 처리하여 오히려 목표에 다가서는 기회로 삼아보자. 그래서 주님의 명령인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훈련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위치에 올라서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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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아마도 우리가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오해하는 구절이 바로 이 구절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2).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이해하기를, 사람이 자기 죄를 용서받으려면 먼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하며,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식으로 한다. 그러면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말씀이므로 다른 말씀들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선행을 해야 나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의 말씀이 그런 의미일까?

 

마 6:12 구절은 이 구절만 보면 언뜻 그런 의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바로 조금 뒤에서 용서에 대한 비유가 나오면서 전혀 다른 의미일 수 있다는 힌트가 주어진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장면이 마 18장에 기록되어 있다. 어느 임금에게 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있었다. 금으로 만 달란트면 대략 만 곱하기 20억원 정도이므로 20조원으로 보면 된다. 상상하기 어려운 만큼 큰 금액이다. 그렇게 큰 금액을 그 임금은 전액 탕감해 주었다. 즉, 모든 금액을 한번에 용서해 준 것이다. 그런데 그 용서받은 자가 밖에 나가서는 자기에게 천만원 정도 빚진 자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그 임금은 만 달란트를 용서받은 사람을 다시 불러서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는 그도 이젠 용서해 주지 않고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둔다는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용서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다. 용서받은 측면과 용서하는 측면이다.

 

사도 바울은 이 비유의 말씀을 직설적으로 풀어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에베소서 4:32 말씀을 보면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받았기에 이제 서로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용서받은 측면과 용서하는 측면이 다시 설명되고 있다. 용서하는 것은 이미 용서받음을 증명하는 것이지 용서함을 통해서 앞으로 용서받음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마 6:12 말씀도 이러한 힌트들을 기초로 해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선행을 하면 자기의 죄가 선행에 상응해서 용서를 받는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용서를 받은 사람이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인지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마 18장의 비유나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보면 한가지 전제가 있다. 먼저 용서를 받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 6장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이렇게 먼저 용서를 받는 것 같은 장면이 없다. 이것은 곧 비유나 바울의 가르침처럼 이 말씀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먼저 용서 받는다는 전제가 마 6장에도 나오지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쉽게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주의 기도라고 불리는 이 기도의 시작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가. 아무나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악인들과 죄인들은 그렇게 부를 수 없다. 하나님은 악인들과 죄인들을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의인들은 그렇게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의 기초이자 시작이자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용서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용서받았기에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될 수 있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대전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며 기도하면서 이제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았는지 회상하면서 그 의무를 잘 수행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용서받았음을 현재에 증명하며 용서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어서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서 그 능력을 간구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이웃을 용서함에 있어서 대전제는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다는 사실이기에 이것을 깨닫고 그 용서받음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용서는 이론으로는 쉬우나 실제에서는 너무도 어렵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은 때로는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정서적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찬은 용서를 지혜롭게 잘 해야 한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찬의 의무라고 해서 무조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의무감으로 용서한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어느 한편에서 일방적으로 혼자 용서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쌍방 모두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야 비로소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질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완전히 녹아지고 풀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가능해지며 그 시작이 열린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먼저 용서해야 – 또는 선행을 해야 – 우리도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결론적으로 우리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용서에는 우리 자신을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겠지만 목적이 충분히 달성될 때까지 우리는 늘 불안할 것이며, 사실 그 목적이 달성되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용서해 주신 것은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며 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먼저 용서해야 우리도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나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나 하나님의 용서의 목적을 기반으로 가늠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며, 과거에 용서받았음으로 인해서 현재에 다른 사람을 용서함으로써 그 용서받았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고 아뢸 때에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과 이제는 이웃을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았음을 확인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하는 것이다. 이 기도를 통해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기다리고 그 능력을 통해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며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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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1. 10. 17. 23:26

기독교 상담의 효과성에 대한 연구

 

(에버렛 워팅턴 주니어 박사의 기고글) https://psychology.vcu.edu/people/faculty/worthington-jr.html

(이 글은 에버렛 박사의 허락을 받고 번역하여 블로그에 올린 글임을 알립니다.)

 

기독교 상담가로서 나는 나의 내담자를 기독교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내가 전적으로 세속적인 상담 환경에서 그들을 치료하는 것과 비교해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고 믿기 원한다. 내가 연결되고 내담자들이 그들의 정신적 건강과 영적 형성에서 도약할 때 나는 멋지다고 느낀다. 그러나 깐깐한 과학자로서 나는 인지심리학(인지심리치료가 아닌, 그러나 인지심리학의 실험적 영역인)이  우리가 얼마나 쉽게 우리 자신의 신념을 왜곡하는지, 특별히 스스로 위안을 삼는 방향으로 왜곡하는지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이번 달에 좋은 결과는 보인 5명의 내담자에게 집중하고, 전혀 변화하지 않은 3명과 그냥 상담을 중단한 2명과 내 눈으로 보기엔 더 악화된 1명에 대해서는 잊어버린다. 그러나 만약 내가 모든 데이터를 함께 고려한다면, 최상의 결과에만 집중하였을 때 만큼 고무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통계와 임상연구 자료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임상 과학에는 하나의 목적이 있다 – 무엇이 효과적인지 아닌지에 대해 나의 판단으로부터 주관성을 없애주는 것이다. 첫째, 나는 내가 적극적으로 내담자를 상담하던 시절을 회상한다. 종종 그들은 첫번째 세션에 나타나서 마치 내가 신학 시험을 치르는 것처럼 한다. 때로는 나의 신학 시험은 그들이 등록을 위해 오기 전에 전화상으로 치러지기도 했다. 목사인 한 의뢰자를 기억하는데 그는 그와 그의 아내가 부부상담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휴거후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믿는지 아닌지 먼저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 내담자들의 “신학 시험”은 좀 더 미묘했다. 그리고 그런 시험들은 나의 상담고객수를 결정적으로 줄여주었다. 이것으로부터 배운 한가지 교훈은 내가 나 스스로를 명백하게 기독교인으로 선언하는 것은 일부 사람들이 상담을 시작하지 않도록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불신자들 그리고 동의할 수 있는 신학을 공유하지 않는 신자들은 내 웹사이트를 보고 말하기를 “나를 위한 곳은 아니네” 한다. 따라서 우리가 자료를 볼 때, 우리는 샘플이 무작위적인 임상 시험을 위해서 등록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과 상담하러 오기 원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서 이미 긍정적으로 편향되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동일한 선택 편항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접근방식을 설명하는 모든 상담자들에게 작용되고 있다.

 

둘째, 수많은 연구들이 “종교적으로 맞춰진 정신 건강 치료법들”을 조사하였다. 즉, 상담자들이 종교적인 내담자들에게 맞춘 치료법들이라는 것이다.  약 100개의 연구들이 메타분석 방식으로 분석되었다. 메타분석은 상담기간 동안에 내담자들의 변화량을 변화를 측정하는 단위와는 무관하게 표준 점수(개선된 정도의 퍼센트와 같은)로 표현하는 통계적 비교이다. 이러한 경우에, 효과 크기(Hedge헤지의 g)가 사용되어 하나의 치료법이 다른 것들과 비교하여 얼마나 효과적인지 나타낸다. 효과 크기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를 이해하려면 우울증을 위해 인지행동치료에 반년 동안 매주 참석하는 것은 샘플의 크기에 좌우되면서 1.0에서 1.2g 정도를 얻는다. 우리의 메타분석에서 분석된 대부분의 연구들은 기독교인 내담자들에게 맞추어져 있지만 모두가 다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치료법이 무슬림, 기독교인, 또는 유대인들에게 맞추어져 있든 아니든 효과는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타분석에서 발견된 것을 기독교인 맞춤형 상담에 적용해도 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종교적 맞춤형 치료법에 대한 메타분석은 모든 종류의 내담자 요인들(patient factors)의 유효성에 관해 더 큰 집단에 대한 메타분석의 부분이다. 심리치료를 위한 미국 심리학회 분과의 합동전담반과 임상 심리학은 내담자의 특성과 조화시키기를 지지하는 증거의 세기를 평가했다. 종교/영성, 문화, 그리고 내담자가 선호하는 것들과의 조화는 “가시적으로 효과적”이라는 가장 강한 지지를 갖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가능하다면, 상담자들은 내담자들이 종교적인 조화를 위해 선호하는 것들을 고려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세 개의 특징들은 그것들이 “아마도 효과적임”을 보이는 증거를 갖는다 – 내담자의 대처 유형, 변화의 단계 (내담자가 단순히 변화를 고려하고 있는지부터 변화를 위해 전념하는지까지의 차이와 함께), 그리고 저항 레벨 (변화에 대한 성격상의 저항의 레벨). 하나의 내담자 특징은 “조짐이 좋기는 하지만 불충분한 증거”라고 판단되는 조화 – 애착 – 을 지지하는 강한 증거를 갖지 못한다. 이것은 내담자의 애착 유형을 고려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상담자가 애착 유형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할 만한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두 개의 특징들은 새롭게 추가되었고, 현 시점에서, 전담반이 어떤 입장을 취하도록 충분하게 조사되지 않았다: 성적 성향과 성정체성.

 

북텍사스 대학의 상담 심리학에서 박사 과정에 있는 로라 캅타리에 의해 방향을 잡은 메타분석은, 북텍사스 대학의 상담 심리학 프로그램의 디렉터이자 부교수인 조슈아 후크 박사와 위스콘신-매디슨 대학의 메타분석 전문가인 윌리암 호이트 박사와 함께, 종교/영성에 조화시키기는 결과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강한 증거를 발견하였다. 물론, 그것은 항상 직접적인 진술보다는 약간 더 복잡하다. 치료가 없는 경우와 비교했을 때 g값은 치료후 시험에서 0.74였고 후속 조치에서 0.81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 맞춰진 치료법들은 매주 6개월 동안의 우울증을 위한 인지행동치료법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의 4분의 3 정도의 g 값을 갖는다. 더욱이 이러한 대부분의 임상 실험들은 26 시간이 아니라 겨우 6 시간에서 12 시간의 치료만이 진행되었다! 다른 대안적인 치료법들과 비교했을 때 – 통상적 치료법 (treatment-as-usual (TAU)), 이완 훈련, 적극적 듣기, 등등 – 그것의 g 값은 치료후 시험에서 0.33이었고 후속 조치에도 0.33이었다. 이것은 괜찮은 것이다. 종종 TAU는 꽤 효과적이다. 그러므로 종교적으로 맞춰진 치료법들이 다른 대안들보다 더 좋다는 이러한 효과 크기들은 아주 훌륭한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종교를 포함하기 위한 것을 제외하고는 종교적으로 맞춰진 치료법과 비슷한 세속적 치료법과 비교했을 때,  g 값은 여전히 치료후 시험에서 0.13이었고 후속 조치에서 0.21이었다. 그것들은 숫자상으로는 더 낫지만 통계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이것은 긍정적 효과이고, 통계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도 말하자면, 만일 약 20개의 연구가 더 이루어졌다면 이것은 통계적으로 의미있는 효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여기 좋은 소식이 있다. 종교적으로 맞춰진 치료법들은 동일한 세속적 치료법들보다 훨씬 더 큰 영적 효과들을 내담자에게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치료가 없는 경우나 대안적 치료가 시행된 경우와 비교했을 때에 아주 확실하다. 또한 종교적으로 맞춰진 치료법들은 내담자들의 영적 삶을 향상시키는 데 있어서 아주 비슷한 세속적 치료법들보다 완전히 더 좋다 (g 값은 치료후 시험에서 0.34였고 후속 조치에서 0.32였다).

 

그러므로 기독교 상담가로서 우리는 우리의 머리를 치켜들고 면허증을 보며 치료 기관을 운영하면서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인에 맞춰진 치료법들은 내담자들의 증상을 개선하는 데 있어서 세속적 치료법들과 비슷하게 효과적이거나 더 나으며, 영적 내담자들을 위해서 세속적 치료법들이 할 수 없는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즉, 더 나은 영적 웰빙을 만들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너무 우쭐대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사리사욕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편향되었음을 지적하는 까다로운 인지 심리학자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러한 연구의 한계들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내가 언급한 것처럼, 무슬림이나 유대인 조정들은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연구가 고려하지 않은 또 다른 요인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얼마나 많이 맞춤형으로 해야 효과적인지, 언제 효과가 발생하는지 (상담의 초기, 중간, 또는 말기), 그리고 어떤 특정한 맞춤형에 의해 누가 실제로 유익을 얻을 것인지 (예를 들어, 천주교인들은 근본주의자들이나 복음주의자들 만큼 성경을 많이 참조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며, 점진적 주류 기독교인들은 상담가들이 성경을 인용하기 보다는 교리를 다루기를 원할 것이며, 은사주의자들은 치유를 위한 직접적인 기도를 원할 것이다) 우리는 말할 수 없다. 또한 어떤 특정 목회적 상담 기법들이 포함되어야 하는지 또는 포함되지 말아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할 것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이런 기법들은 내담자를 위한 기도, 치료 상담 중에 기도하기, 내담자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하기, 성경 본문을 주해하도록 하기, 성경으로 개입 방식과 개념화 방식들을 정당화하기, 신학과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들을 다루기 (예를 들어, 내 아이가 술취한 운전사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실망 등이다.

 

과학적 연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메타 분석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부 사항들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러나 지식의 호수가 확장되듯이, 우리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의 해안선은 더 길어지는 것 같다.

 

이 기사는 Christian Counseling Today 잡지의 볼륨 24 번호 1에 원문이 나온다. Christian Counseling Today 잡지는 미국 기독교 상담가 협회(American Association of Christian Counselors)의 기념비적 발행지이다. AACC에 대해 더 알려면 https://www.aacc.net/ 방문하면 된다.

 

에버렛 워팅턴 주니어는 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의 명예 교수이다. 그는 상담 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래로 42년 동안 과학적으로 기독교 상담을 연구해 왔다. 워팅턴 박사는 수많은 개입 방식들을 만들었다 – 가장 잘 알려진 것은 REACH 용서법 (http://www.evworthington-forgiveness.com/)과 소망 중심의 부부 접근법(www.hopecouples.com)이다. 이에 대해서는 무료 자료들을 웹사이트에서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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