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풀숨 2024. 4. 11. 18:55

    부활절을 지나면서 새삼 기독교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그리고 죄가 하나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위해 기꺼이 죽으셨고 의롭기 때문에 부활하신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증명되신 하나님, 바로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왜 위대한지 알게 된다. 단순히 부활하셨다는 사건 때문에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와, 그분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부활, 이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의 위대함이 어떻게 증명되었는지 아는 것은 크리스찬으로서 너무도 중요하다. 먼저 결론을 말하면 우리 기독교의 위대함은 가지 진리로부터 나온다. 하나는 우리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기독교는 역사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진리이다.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하면 좋겠다 (https://comfortye.tistory.com/53). 그럼에도 다시 생각해 보면, 구약 성경에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은 힌트가 주어졌다. 가장 먼저는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천지 창조의 구절들에서 드러난다. 하나님과 성령님과 말씀이 함께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결정적으로 1장 16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신가 하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말씀이 나타난다. 신학자들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에서의 “우리”라는 단어가 삼위일체와 관련이 있다는 것에는 다 동의한다. 다만 구약시대에는 삼위일체에 대해 아주 희미해서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까지는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제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와 가르침과 부활을 통해서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드러나셨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 하나님이신데 세 분이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깨닫고자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부던히 노력했고,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 기독교가 달려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참으로 어려웠다.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위일체는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에 대한 개념이고 우리는 이성과 지성에 한계를 지닌 피조물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래도 수많은 토론과 기도와 묵상과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있는데 그것을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이다.  

 

    우리는 한 분이시요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믿나이다.

    또한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만세 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외아들을 믿나이다.
    이는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이시요, 빛에서 나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으로,
    지음 받지 않고 나시었으며, 성부와 한 분 본체로서,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나이다.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사람이 되셨나이다.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되셨으며,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사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하리이다.

    또한 우리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시며,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우리는 하나요,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사함 받는 하나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에서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이 고백에서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나신”, 즉 영어로는 begotten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함이지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니까 나시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태어나신 분이 아니다. 세 위격의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본질과 능력과 모든 것이 완전히 동일하신데 다만 세 위격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나셨다” 또는 “나오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세 위격이 어떻게 셋이지만 하나인지 설명하는 것이다.

    그 당시 수백 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지혜를 모아 이 신조에 도달하기까지 300 여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후에도 이 고백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수많은 신학 서적들과 논문들이 나왔다. 모든 정통 신학자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교리가 기독교의 핵심이며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줄까? 삼위일체 교리가 아니면 우리 기독교는 위대함을 잃어버리게 될까?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에는 다양한 신들이 있다. 그런데 어느 종교든 최고의 신은 한 분이라고 가르친다. 그 최고의 신 아래 다양한 신들이 계층적으로 존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등급 신들 또는 하위급 신들은 최고의 신에 비하면 그 능력과 존재감이 많이 떨어지고, 결국 최고의 신은 항상 단수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성경말씀을 토대로 하여, 신은 오직 한 분밖에 없으며 그 한 신, 곧 한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렇게 세 분(위격)으로 존재하신다고 가르친다. 한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으로 존재하셔서 모두 다 하나님이시지만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다.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이라고 가르치기에 논리적 모순이라고 세상사람들은 비웃기도 한다. 하지만 역으로 그래서 오직 기독교만 이 진리를 가르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진리야말로 진짜이다. 그 이유가 기독교의 전부이며,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되게 하는 위대함이다.

    모든 종교들은 자기네 최고의 신은 전지전능하며 영원하고 또 사랑이 넘치고 의롭고 자비하며 선한 신이라고 주장한다. 이렇지 않은 신은 최고의 신이 될 자격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덕목들 또는 속성들 가운데 사랑과 의와 선함과 자비와 신실함 등은 인격적 관계를 기초로 하는 덕목들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뿐 아니라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가능한 덕목들이다. 자기 혼자 사랑하면 나르시스트일 뿐이며, 자기 혼자 의로우면 독불장군이 될 뿐이고, 자기 혼자 선하면 선의 의미 자체가 없게 된다. 다른 관계적 덕목들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덕목들은 반드시 자기와 동등한 그리고 본질적으로 동일한 상대가 있어야만 진정으로 가능한 덕목들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이방 종교들은 이 덕목들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자기네 최고의 신은 사랑이 넘치고 의롭고 자비하며 선하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최고의 신일지라도 본질적으로 동등한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을 진실로 알 수 있을까? 어떻게 진실로 의로울 수 있을까? 그 신이 자기의 생각만으로 사랑을 만들어 내고 의를 만들어 낼 뿐인데, 그 생각에 이미 사랑과 의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저 독불장군일 뿐이다. 진실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알 수는 없다. 바로 여기서 기독교는 다르다. 오직 기독교가 가르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에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진실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사랑과 의로움과 자비와 선함과 신실함을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인 우리 사람에게도 사랑과 의로움과 자비와 선함과 신실함에 대해서 우리의 존재에 심어주실 수 있으신 분이다.

    특별히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정의하면서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등의 단순 명제를 사용하여 선포한다. 이 정의들은 하나님은 사랑을 하나의 속성으로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시라는 의미이며, 또한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빛이시며 동시에 사랑이시며 동시에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신실하시며 동시에 전지전능하시며 동시에 영원하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영원히 동일하게 이러한 분이시다. 성경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선포할 때 하나님의 의로움은 잠시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고 선포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잠시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이성과 지성을 아득히 뛰어 넘는 것이기에 우리는 때때로 이 진리를 오해하기도 하지만 이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진실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우리 기독교가 알려주는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진실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사랑이시기 때문이며 진실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자비하시며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우리의 전부를 무조건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이 진리를 통해서 선명해지고 방향이 확실해진다. 그리고 달라진다. 막연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를 바라보면서 확신을 가지고 달라질 수 있다.

 

    이제 기독교의 위대함의 근거인 역사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크리스찬이 되고 나서 우리의 신앙은 다양한 변화를 겪는다. 놀라운 경험을 하면서 급격하게 성장하기도 하고 또는 정반대로 급격한 좌절과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주변의 모든 것이 다 사랑이고 기쁨이고 노래이고 웃음과 밝음이 하루 종일 계속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아무런 까닭없이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두려움에 떨면서 밤을 꼬박 새며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지만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좌절과 패배감과 우울증과 퇴보를 심하게 겪으면 한동안 침체기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평생 이러한 심한 좌절을 전혀 겪어보지 않은 분도 있을 것이다. 다만 크건 작건 누구나 신앙의 부침은 있었고 또 앞으로 우리의 삶에서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의 어둔 밤을 지나고 있는 경우에 어떻게 이것을 극복해야 할까? 아마도 먼저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기적같은 경험들을 기억하며, 과거에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서 내가 비록 지금은 의심의 구름에 휩싸여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과거처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해주실 것이라고 소망의 줄을 잡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신앙이 침체되면 나의 과거마저도 의심스럽게 되고 과거의 은혜들이 나의 착각이었거나 우연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바로 이때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식이 있다.

    대표적으로 누가복음 1장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이다. 지금 누가는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사실,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 수많은 증인들이 목격한 사실에 대해서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 관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역사적 진실에 대한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거짓이 없다. 행여 누가의 기록을 해석하는 우리에게 오류가 있을지라도 기록 자체에는 오류가 없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해석이 필요 없는 역사적 진실만을 생각해 보자.

    지금으로부터 약 2000 년 전에 예수라는 인물이 존재했다. 그는 마리아라는 유대인 처녀, 곧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이 잉태와 탄생은 어느 산골에서 아무도 모르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목격자와 증언자가 있는 사건이었다. 이 예수라는 분은 자라며 구약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진 비범한 분이었다고 증언되었다. 그리고 최소한 세 명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려냈고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었으며 바다 위를 걸었고 아주 적은 음식으로 수 천 명의 사람들을 먹이는 기적들을 행했다. 그리고는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셔서 수 백 명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으며 마침내 그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서 증인이 최소한 수 십, 수 백 또는 수 천 명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서 하나라도 거짓이 있으면 지금 기독교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건들이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을 목숨을 걸고 증언한 사람들이 전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주장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것이 진실이라며 자기 목숨을 거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상이나 신념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들은 그 당시에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목숨을 바쳤던 것이지 그것이 거짓이며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은 없다. 역사적 사건은 시간이 한참 지난 나중에야 진실이냐 거짓이냐 밝혀질 수 있는 사상이나 신념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명되는 것이다. 수많은 직접 목격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언약들을 맺으신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다. 성경책의 이름이 바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인 것만 봐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이 언약들이 역사적 사건들이 아니면 아무런 효력도 구속력도 갖지 못하게 되고, 그저 사람들의 희망사항을 기록한 것에 불과할 뿐인 그렇고 그런 책이 될 뿐이다. 이 언약들이 역사적 진실이기에 효력을 갖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언약들을 성취해 오셨고 마침내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모든 언약들이 완수될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역사에 뿌리를 단단하게 박고 있다. 때로는 역사적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우리가 그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메신저들을 통해서 친히 해석해 주시고 설명해 주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셨다. 이것이 중요할까? 이것은 바로, 성경이 어느 한 사람의 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이렇게 객관적으로 증언된 역사적 사건들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 우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나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들이 없으면 나의 경험들도 공중에 떠있는 구름과 같은 것일 뿐이다. 우리 각 개인의 경험들 –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풀어주신 기적 같은 경험들은 이와 같은 역사적 진실을 바탕으로 해야만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때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도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의 착각이나 우연에 의한 경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처럼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객관적으로 증거된 기록들을 보면서 나의 삶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생각이 바뀌게 된다. 의심과 두려움과 어려움에 의해 흔들리던 믿음이 역사적 진실을 통해 확신으로 바뀌게 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더욱 잘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 가운데 행하신 사건들에 대한 기록과 그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을 기록한 책이다.

    기독교는 역사적 사건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역사성이 무너지면 기독교도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수많은 불신자들이 기독교가 기록한 역사를 부정함으로써 기독교를 무너뜨리려고 시도해 왔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진실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어느 누구의 머리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며 어느 누구의 희망사항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역사적 진실을 근거로 하기에 흔들릴 수 없으며, 그 역사가 나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실제로 적용되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에 대한 주관적 적용이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역사적 진실에 근거하고 있기에 우리에게 확신을 주며 흔들리지 않는 것이며 바로 이 핵심을 알아야 우리의 신앙이 든든히 성장할 수 있다.

 

    기독교에만 있는 아주 독특하고 유일한 진리인 삼위일체 하나님과 기독교의 역사성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을 강력하게 가르쳐 주는 핵심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선언은 인간의 희망이거나 어떤 창작물이 아니다. 삼위일체에 의해 증명되고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진리이다. 따라서 오직 기독교가 선포하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며 유일한 하나님이며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분이시다.

    이 진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영향력을 가져야 하고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 활동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가 어려우니 멀리 놓고 그런가 보다 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삼위일체를 가르쳐 주신 이유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이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한 사랑이신지, 얼마나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한 의이신지, 얼마나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한 신실하심인지 깊이 묵상하며 이 진리가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도록 해야 한다. 그 어떠한 두려움도 또는 그 어떠한 업적도 이 진리 앞에서는 마치 태양 앞에 있는 반딧불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것이니 우리는 흔들림 없이 힘을 내서 더욱 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