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특히 개혁주의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갖는 경우 중에 하나는, 마치 전혀 잘못을 하지 않았거나 또는 예수님을 알 수 없어서 구원받을 기회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인데도 지옥에 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었으니 결국 그는 지옥에 갔다는 말을 듣는 경우인데 가족이라서 그가 착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에 갔다는 말을 듣는 경우인데 가족에 대한 얘기라서 더욱 반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통해 말했던 것처럼 복음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아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지옥이라는 말이 초래하는 논리적 파생의 편린들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불신자의 결단을 촉구하고자 ‘믿음’을 강조한다. 믿어야 구원 받고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하고, 또 반대로는 믿지 않으면 반드시 지옥에 가게 된다고 강조하여 불신자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마치 구원 받음이 전적으로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인식을 주게 되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 강하게 부닥친다. 전도자는 이제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그냥 밀어부치다가 더 큰 반발심만 경험하고 뒤로 물러서는 경우가 많다. 이는 결국 전도자의 말이 반만 맞았기 때문이다.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말은 맞지만 구원 받음이 전적으로 사람에게 달린 것처럼 표현한 것은 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하는 크리스찬들이 있다. 그들이 근거로 드는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로마서 2:12~15 말씀 중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이다. 그들은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율법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는 이방인들은 자기 양심껏 살면 구원받을 수도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혹시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아주 과거의 사람들은 자기 양심껏 살았으면 그들도 구원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자기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으니 – 유대인은 율법에 비추어 보면 그것을 알 수 있고 이방인은 양심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며 –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므로 예수님이 알려진 곳에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혹자는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은 결코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맞는 말일까? 그렇다.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들어야 알게 되고 알아야 믿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들음이 반드시 복음전도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롬 10:18). 하나님은 복음전도자뿐만 아니라 천사들이나 무엇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릴 수 있으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 적절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과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아브라함이나 유대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물인 욥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이 다른 곳에서 일어나면 안 된다는 이유가 있겠는가.
요점은 이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구원의 통로이자 방편인 믿음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는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미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에 오직 하나님을 배척하고 배신하고 무시하기만 하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며 사람이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그러한 성향을 절대적으로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평생의 삶의 기준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자기자신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려면 하나님이 은혜로이 먼저 그 사람에게 오셔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회복시켜 주시고 교제의 손길을 끊임없이 내밀어 주셔야만 가능하게 된다.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믿음이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믿음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다. 믿음은 일차적으로는 오히려 구원을 위한 수단이며 하나님에 의해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알게 하는 도구이다. 그리고나서 이차적으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미에서 쌍방간의 신뢰를 의미한다.
이제 단순히 예수님을 모른다고 해서 또는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뭔가 성경적이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받는 것이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구약 시대에 구원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의지했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보다 더 뚜렷이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것이며 어쩌면 성경에 기록된 이름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다 – 다만 이방인들의 신들의 이름은 아니므로, 예를 들어, 부처가 하나님과 동일하다든지 하는 말은 철저한 거짓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다르게 불렀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은혜로 인정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자기 스스로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양심을 통해 깨닫게 되고 오직 하나님만을, 그들이 하나님을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지 간에, 의지해서 구원받기를 소망했들 것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과 그들만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전적으로 합당한 일이다. 그 사람의 행적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을 놓고 막연한 추측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불합리하다. 설령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기록을 남겼더라고 그들의 속마음이나 신앙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으니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며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그 시대에도 그리고 비록 이스라엘 밖에서 살았을지라도 분명히 하나님은 은혜로이 사람들을 구원하셨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 현 시대에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니 그 시대에는 희미하게라도, 복음을 듣는 것보다는 훨씬 불분명하게 하나님을 알았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가능했었다. 다만 이것은 시대적 상황이나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복음이 전해진 곳에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 명확히 알고 확실하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열매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회가 되는대로 복음을 전하고 삶을 나누어 하나님을 함께 경배해야 한다.
따라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마치 전적으로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믿음을 가져야 하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처럼 복음을 왜곡하면 복음을 전하는 자나 복음을 듣는 자나 모두 망하게 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복음을 듣는 자가 복음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는 예수님께 나아올 것이고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조용히 물러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이번이 아니라고 해서 마치 그에게 다시는 기회가 없는 것처럼 지옥에 간다고 협박하며 믿으라고 강요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에 맡겨서 다른 전도자를 보내주시기를 바라며 안녕을 빌어보자. 하나님은 그의 인생도 보살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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