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본질적 중요성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하니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창 25:33~34)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히 12:16)
어느덧 많이 추워졌습니다. 감기나 코로나 등 건강에 더욱 조심해야 할 시기입니다. 이번에는 창세기 25:27~34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모든 것의 본질적 중요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얽혀있습니다. 어떤 사물이나 존재들뿐만 아니라 아주 다양한 일들 속에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게 중요한 건가?’ 하는 물음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특히 뭔가에 바쁜데 다른 어떤 것이 도중에 끼어들거나, 또는 여러 선택지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런 기억이 납니다. 좀 오래된 이야기인데, 모처럼 제 아내와 영화도 보고 외식을 하며 데이트하려고 막 나가려는데 장모님한테 연락이 와서 뭘 좀 도와달라고 했던 경우입니다. 이제 막 데이트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갑자기 무엇이 끼어들어서 순간 당황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나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결정을 어떻게 내리나요? 그냥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서 또는 나에게 더 이익이 되겠다는 생각에 따라서 또는 나를 즐겁게 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서일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에서도 바로 그 문제가 제기되는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사건에 직접적으로 들어가기 앞서 먼저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의 가정에서 일어납니다. 이 가족은 이전 설교에서 살펴본 내용대로, 이삭, 리브가, 첫째 아들 에서, 그리고 막내 야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그리 화목해 보이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특정 자녀만 더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장자인 에서는 주로 밖으로 돌고, 어머니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막내 야곱은 어머니 곁에 주로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네 가정들도 비슷하겠지요. 가족들 사이에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 경우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이 갈라지면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속으로는 애정결핍으로 인해서 정서적 불안을 경험하게 되고 다른 형제에 대해 시기와 질투를 느끼게 가능성이 큽니다.
흔히들 열 손가락 중에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냐고 말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는 은연 중에라도 어느 한 자녀만 편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곱이 태어날 때부터 좀 약삭빠른 성정을 가지고 태어나긴 했지만 에서에 대해 시기와 질투가 많았던 것은 이러한 가정 환경도 큰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자녀들이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면, 혹시 자녀에 대한 부모 모두의 사랑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닌지 보시고 또 충분하다고 생각이 들더라도 오늘은 집에 돌아가셔서 자녀들 모두를 하나씩 안아주시며 사랑한다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지 않지만, 애정결핍을 겪었던 아이는 하나님의 사랑도 쉽게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4 에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모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러한 가정 환경에서 어느날 한 가지 사건, 즉 모든 것의 중요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에서가 사냥에 나갔다가 육신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지쳐서 집에 돌아왔는데 야곱이 죽을 요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에서의 눈에 그 죽이 얼마나 맛있게 보였겠습니까. 몸도 지치고 배도 고프고 좀 쉬고 싶은데 빨리 배를 좀 채우고 편안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야곱이 만들고 있는 죽은 에서에게 지금 현재 가장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는 그 죽을 달라고 야곱에게 부탁했는데, 약삭빠른 야곱은 이때 하나의 기회를 보았습니다. 더욱이 리브가를 통해 계시된 말씀, 즉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는 말씀을 마음에 품고 있던 야곱에게 이 기회는 천금과 같은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이 가지고 있는 장자로서의 자리가 탐이 났던 야곱은 그 죽과 장자권을 교환하자고 거래를 제안합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아주 수지맞는 거래였습니다. 따라서 에서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응해서는 안 되는 거래였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그 거래를 받아들여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주전 2000년 경에 장자권이란, 일반적으로 첫째는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이 될 권리, 둘째는 가문의 제사장이 되는 권리, 그리고 유산 상속의 우선권 등을 의미했습니다. 이에 더하여 이삭에게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져 온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축복의 상속권이 있었기에, 그 장자권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장자권은 그냥 포기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축복의 상속권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에서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가볍게 여겼으니, 결국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무시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약속도 축복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가문에서 첫째가 되고 싶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모든 좋은 것은 다 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꾀를 내어 에서가 가장 약해져 있던 상황에 기회를 잡았습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꾀를 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죽 한 그릇과 장자권은 서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므로,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넘기라는 거래 자체를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열망, 즉 첫째가 되고 싶고 모든 좋은 것을 다 받고 싶다는 열망으로 인해서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꾀를 냈습니다. 비록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향한 열망에서 이런 꾀를 내었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야곱이 잘 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야곱의 이 약삭빠르고 시기, 질투 많은 성격은 그후에 많은 고난을 통해서 고쳐지고 결정적으로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매달리는 과정에서 하나님 앞에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제안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장자권을 내어줍니다. 아마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는 게 먼저이지 죽고 나서는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일단 살고 봐야지’ 하고 말입니다. 그는 사실 대강 30분 정도를 참지 못했던 것입니다. 맛있는 죽 냄새를 맡았으니 얼마나 먹고 싶었겠습니까마는 30분 정도만 참으면 얼마든지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장자권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에서에 대해 평가하면서, 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망령된 자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망령된 자란 ‘불경스런’, ‘세속적인’, ‘사악한’ 등의 의미를 뜻합니다. 에서가 하나님을 무시했다는 의미입니다.
에서는 왜 장자권을 가볍게 생각했을까요? 그 상황에서 에서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빠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여기에서 핵심은, 무엇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의 주제처럼, 어떤 일이나 사물의 중요성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준이 바로 서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기준이 없으면 그냥 기분에 따라서 또는 내 이익에 따라서 또는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그 기준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눈치채고 있겠지만, 장자권이 중요한 이유는 장자권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축복이 들어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가문의 대표가 되는 권리나 유산을 더 받는 권리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나 사물이나 존재나 무엇이든 그것이 중요한지 아닌지 결정하는 기준은 그것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또한 우리의 구원자 되시므로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라도 중요한 것이 될 수밖에 없고,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결코 중요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준입니다. 어떤 일이나 사물이나 존재나 무엇이든 그것의 중요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기준은 현재 우리의 세계에서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똑 같은 시계라 할지라도 대통령이 하사한 시계는 훨씬 더 귀중하고 소중한 시계가 됩니다. 몇 년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영국의 아주 유명한 축구 감독이 씹던 껌이 아주 비싼 가격에 경매에 올라왔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씹던 바로 그 동일한 껌, 즉 하나에 1 달러도 하지 않는 것인데 그 세계적인 감독이 은퇴 경기에서 씹던 껌이었기 때문에 수십 만 달러 짜리 비싼 껌이 된 것입니다. 시계나 껌 같이 흔한 것이라도 대통령이나 세계적인 축구 감독과 관계 되면 이렇게 중요해집니다. 하물며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관계 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해질까요?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부모의 애정이 자녀들에게 엇갈리는 문제로 조금은 삐그덕대는 이삭의 가정에서 야곱과 에서가 자라고 있는 도중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에서 에서의 행동은 분명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장자권의 본질적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으며 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그는 결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의 중요성을 어떻게 결정하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따져 보십니까 아니면 지금 당장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지를 먼저 따져 보십니까? 아마도 우리는 그동안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닌가를 최우선적으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바뀌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나 사물 또는 존재 등, 모든 것의 중요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비록 내게 이익을 줄지라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과감히 버려야 하고, 내게 손해를 줄지라도 하나님이 귀하게 생각하시는 것이라면 과감히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이웃을 귀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모든 것을 우리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이렇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들과 함께 하도록 바뀌게 됩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이렇게 바뀌도록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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