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에 해당되는 글 51건

  1. 2020.09.18 내일 뵐게요
  2. 2020.09.12 저녁의 꿈
  3. 2020.09.04 초겨울 새벽
  4. 2020.09.04 기억의 시간
  5. 2020.08.29 예감
  6. 2020.08.29 봄의 다짐
  7. 2020.08.22 너에게서 가장 먼
  8. 2020.08.15 하루의 묵상
posted by 풀숨 2020. 9. 18. 21:28

내일 뵐게요

 


이재이

 

 

툭 던져진 한 마디

듣는 사람이 있든 없든

스스로의 다짐처럼 낡은 담요처럼

문턱을 넘지 못하고 쌓인다

 

빵 부스러기를 먹다

사람이 다가서면 날아오르는

비둘기 발자국처럼

사람과 적당한 거리 유지하며

사람이 던져주는 먹이에 의지해 산다

 

우리 입술에 사는 비둘기가 여럿 있다

언제 밥 한번 먹어요

다시 연락할게요

내일 뵐게요

 

반복되고 겹치다가

점이 지워지듯 사라지면

마지막 남은 이

문간에 널브러진 다짐을 묶어

문 밖 가문비나무에 노란 띠로 달아놓는다

 

그러면 빵 부스러기 찾아

모여드는 비둘기의 체온을 위해서

내일은 그렇게 던져지듯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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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9. 12. 06:13

저녁의 꿈



이재



콩나물국에 밥을 먹고

나무의자에 모로 앉아 잠든 너는

차가운 목욕을 하는 중이다

TV는 하얀 벽을 치고 질식한 채

벽화처럼 섬이 되고

나는 섬에 혼자 남은 노란 신호등

너에게 담요 한 장 덮어주는 것이 전부다

꿈은 너의 식어버린 몸에도 내릴까

커피향 창가에 

야생화 한 다발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바다의 성벽에 새 글자 새겨질까

밤은 더욱 부풀어 올라 깨지 않고

할로겐 불빛을 봉인하는데

나는 푸른 바다에 서서 너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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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9. 4. 23:58

초겨울 새벽



이재이



안경을 바로 쓰며 뒤돌아 보았다


앞은 깨진 가로등 길

뒤는 멀리 있고 손잡이는 닿지 않는다


어둠의 두께를 만질 수 있다면

가시 같은 구멍이라도 시도해 볼 텐데


시력 잃은 까마귀처럼

개똥바람에 구르다 예배당 문간에 부딪쳐

양팔 벌린 채


엎드려 기도한들

어차피 앞은 낙엽 차가운 새벽


갯벌 속에서

발걸음 혼자 하루를 삼킨다


핏자국 낙엽 위를 뒹굴어야 넘어가는

오르막 언덕 아래

생수 배달 트럭이 툭툭툭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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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9. 4. 23:56

기억의 시간



이재이



누나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어서

기억을 잃는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내일을 계획하지 못한다

이십 년 전, 제왕절개수술 받을 때 사고로 인해서

아이를 낳기 전까지의 일들은 기억하지만

그후의 일들은 이십 분 동안만 기억할 수 있다

내 얼굴도 내 이름도 알지만 내 아이는 기억하지 못한다

자기 아이의 이름은 매일 아침에 입력된다

엄마를 만나러 와서는 왜 이리 주름이 늘었냐고 묻고는

엄마 보고 싶어 왔다가 돌아가신 아빠를 만나고 간다


우리집 현관문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가끔 문을 열어주지 않아 저녁마다 내 얼굴을 확인시킨다

오늘 저녁에는 나를 뒤따라오는 발자국을 받아들이지 않고 문을 닫는다

발자국을 거두지 못한 나는 하루를 기억하지 못한다

집에 들어온 것은 기억하는데 아침과 오후는 모자이크에 빠졌다

어느 정도 과거를 잊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정신과 전문의가 TV에 나와서 했던 말이 기억났다

잊을 건 잊어야지,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하는 나이든 엄마와

무슨 일이든 이십 분 동안만 슬퍼할 수 있는 누나와

현관문 앞에서 문을 열지 못해 끙끙대는 나는 기억의 식구다

누나와 다툴 일이 없어도

누나를 안아줄 기억이 없어도

식구들과 하루를 만들고 잊고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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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9. 05:16

예감



이재이



언제나 떨림으로 온다

별의 흔들림을 담아야 했기에

새로운 소식의 엔트로피를 느껴야 했기에.

태곳적에

모두가 사제였던 흔적이

유전자에 밀봉되어 있다가

어느날 불현듯 몸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슬픈 예감이 틀리지 않는 것은

슬픔에 길들여진 몸이 더 잘 감응하는 것이다.

제단 잃은

평민의 삶이 훨씬 더 고단한 까닭이다.

무의식적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저녁 시간은 늑대의 하울링

고장난 엘리베이터에 갇혀서 거는 비상전화

떨림을 예비하는 의식이다.

새벽녘 별의 뒷목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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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29. 05:15

봄의 다짐



이재이



웃음에 촛점이 없어도 좋다 친절에 마음이 없어도 좋다

너의 영역을 두드리기 위해 어설픈 웃음이면 어떻고

너의 눈길 맞추려 조금은 쑥쓰러운 친절이면 어떠랴

산그림자처럼 삐죽삐죽 도사리고 있는 쓴 맛 걷어내고

그나마 먹을 수 있는 맛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어떠랴

아직은 쌀쌀해서 움츠러드는 발걸음 총총총총

파고다 공원 뒷길로 걸어가는 할아버지 붙잡고 “안녕하세요?”

어색한 듯 건네는 부끄럼이면 어떠랴

한 마디 말이 겪는 놀람의 파동으로 촛점이 생기고

마음이 형체를 만들어 뫼비우스띠가 묶인다

오늘에 친절 매어 너에게 보내며

주저앉아 더 이상 갈 수 없다며 떼 쓰는 너를 안고

한 걸음마다 무릎 꺽이는 걸음일지라도 웃음 담고 싶다

거창하게 사랑이라 용서라 하지 않고

이른 봄의 매화꽃 살랑살랑 흔드는 희망 쯤 된다고 하면 좋겠다

어제 지나고 오늘이 있다는 희망

출근하면서 너에게 “굿 모닝” 하는 입술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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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서 가장 먼



이재



싸락눈 첫눈 온다

올해 처음 온 눈은 아니지만 첫눈이다


첫눈이 되는 기준은 눈에서 가장 먼 여름이다


너를 안아 머리를 받치느라

늘어진 티셔츠에 밴 너의 여름을 찾는다


평생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는,

쌀을 벌기 위해 다니다 밤비탈 굴러 며칠 앓아누웠어도

누워 있던 며칠을 미안해 했던, 내 나이의 아버지는 나의 여름이다


마당에 쌓인 쌀알 치우느라

맹그로브 숲처럼 얽힌 너의 입술에서 가장 먼 말 지우느라

가슴 뻐근한 하루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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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8. 15. 08:24

하루의 묵상

 


이재이


 

탯속에선 아랫배로 쉬던

자라면서 얕고 거칠어져 가슴에 머무는데

끝에서 들락이는 숨의

열을 내리고

추를 달아 아래에 쌓으면 문답 없는 침묵이 온다

 

무릎꿇고 엎드려

단어들을 침묵에 담그는 연습을 한다

 

의심에 단어들은

흙만 털어내 뿌리째 담그고

살맛 나는 단어들은

씻어서 소금에 절여 담가야 한다

 

자전거를 처음 배웠을 때처럼

무릎과 팔꿈치 상처에 딱지가 앉을

 

질그릇 항아리 열고

날숨으로 문장 하나 길어 올려

십자가에 담아 일어선다

태곳적부터 내려온, 지금은 잊혀진 지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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