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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9. 14. 09:54

세계관을 중심으로 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복음 전도



사람들은 현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말한다. 어느 하나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고 변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이해하며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대체로 인정했던 “진리”마저 이제는 더 이상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고, 진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만 진리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각 개인과 각 공동체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런 주장을 통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결론으로 인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크리스찬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지 간단하게나마 고민해 보고자 한다.

본 페이퍼는 이러한 고민을 위한 사고의 틀로서 세계관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하고자 제임스 사이어의 두 책, “코끼리 이름짓기”와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을 중심으로 한다. 이는 세계관이야 말로 세상 사람들의 가장 근본적인 생각의 바탕을 정리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본 페이퍼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을 중심으로 하여 이 시대를 공유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지혜롭게 전파할 수 있는 방법을 살펴 본다.


세계관이란

칸트가 잠깐 스치듯 언급하고 지나갔던, 그리고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처음 사용된 세계관이란 용어는 처음에는 상당히 풍부하고 광범위한 의미로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맥락에 등장하여 사용되었다. 따라서 어떤이들은 세계관이란 아주 모호한 개념이라고 보았고 또 모호하기 때문에 유용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기독교 진영에서는 맨처음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신학자인 제임스 오르가 이 용어를 사용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여 기독교를 보다 뚜렷하게 당대의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이 개념은 아브라함 카이퍼 등 다수의 기독교 신학자들을 거쳤는데, 카이퍼는 세계관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삶의 체계”로 이해하며 전적으로 “하나님, 인간, 세상”이라는 관점에서 정립하고자 하였다. 제임스 사이어는 세계관을 이렇게 정의한다.


세계관이란 이야기의 형태로 혹은 실재의 근본적 구성에 대하여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관적이든 비일관적이든) 보유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부분적으로 옳거나 완전히 잘못된)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몸 담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는 하나의 결단이요 근본적인 마음의 지향이다.


그가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마음의 지향”이라고 정의한 의미는 한 사람의 생각과 판단과 행위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바탕이 바로 그 사람의 세계관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사이어는 세계관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다음의 7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세계관을 정의한다: “1. 진정으로 참된 실재는 무엇인가? 2. 외부의 실재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3. 인간은 무엇인가? 4. 인간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5.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6.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7.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존재론과 인간론, 인식론과 윤리등을 포괄하여 정신 체계의 전 영역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되는 질문들이다.

이러한 7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연구함으로써 이 세상에는 사람 숫자 만큼 많은 세계관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또한 중요한 세계관은 손가락을 셀 수 있을 정도 만큼 밖에는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압축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에서 모두 7개의 세계관을 정리하였다. “기독교 세계관, 이신론 세계관, 자연주의 세계관, 허무주의 세계관, 실존주의 세계관, 뉴에이지 세계관,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관”으로 정리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참조하는 위키백과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로부터 시작하였다고 기술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난 해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예전에는 당연시 여겨지던 것들을 해체하여 새로운 경향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는 건축으로부터 시작하여 사각형의 상자 모양의 건축을 둥근 형태라든지 심지어 휘어진 형태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 경향은 다른 분야로 확산되어 그 다음에 문학이 영향을 받았고 철학으로 퍼져나갔다. 철학에서도 이성 중심에 의한 일률적인 것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강조하며, 이성을 중시한 모더니즘의 철학도 하나의 담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이성에 의해 정형화된 구조주의를 해체하고 다양성과 다원성으로 나아갔다.

제임스 사이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분석함에 있어서 니체의 “광인”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모더니즘 시대의 마지막 부분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의하였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 진리의 죽음, 곧 신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리요타르의 정의, 즉 포스트모던이란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이라는 것을 인용하여 서구 사회가 인정해 왔던 하나의 거대담론을 거부하고 다양성과 다원성으로 나아간 것이 포스트모던한 삶이라고 분석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의 가장 중요한 점은,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은 실재에 대한 존재론을 가장 우선적이며 모든 사고의 근본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이어는 하나의 세계관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7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였다고 상기하였다. 그 첫번째 질문이 바로 “진정으로 참된 실재는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에 대한 질문이었다. 왜냐면 존재론이 의미론 보다, 즉 형이상학이 인식론보다 앞서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사고는 이것을 거부한다. 실재적 존재는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인식론이 존재론보다 더 앞서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실재적 존재가 감추어져 있다 함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적 존재 자체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알 수 없고 언어로 정의되는 대로만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언어 또는 문학에 대한 재정립을 요구하며, 미쉘 푸코는 언어가 권력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였다. 언어로 정의된 대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렇게 답한다고 사이어는 분석하였다. “실재 자체에 관한 진리는 영원히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뿐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에서는 우리가 실재에 대해서 진실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재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진정성은 단언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한다. 다만 언어는 어느 담론에 따르게 하는 힘, 곧 유용성만을 갖는다고 본다. 그래서 어느 담론에 대해서든 공동체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그 공동체 안에서 진리가 될 수 있다. 다른 공동체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다. 사이어는 이 부분에 대한 결론으로서 이렇게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속에는 (1) 계시에 의한 확정적 거대담론이라는 ‘전근대적’ 관념에서 (2) 대응의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인간 이성의 자율성이라는 ‘근대적’ 관념을 거쳐 (3) 우리의 목적에 걸맞는 언어를 구성함으로써 우리가 진리를 창조한다 – 비록 이런 언어가 분석의 순간에 해체되지만 말이다 - 는 ‘포스트모던’ 관념으로의 이행이 존재한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렇게 답한다: “실체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에 관해 묘사하는 그 언어에 의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존재다.” 사이어의 분석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은 스스로 무엇을 할지 선택함으로써 자기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로 이해한다. 이것은 진화론적 사고에 의하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물론 진화론은 실체적 자아를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한 실체적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진화의 산물인 것이며 없다고 하여도 그것도 진화의 산물인 것뿐이다. 그러나 진화론 역시 인간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생각을 강화시켜 준다. 따라서 윤리란 어떠한 절대적인 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진리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동의와 필요에 의해 정의되는 것일 뿐이다.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필요에 따라 정의되는 언어적 구성물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인간에 대한 관점과 윤리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사이어는 이렇게 정리한다.


여기서도 (인간에 대한 관점에서도: 본 페이퍼가 삽입한 것임) 비슷한 변화를 볼 수 있다. (1)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존귀한 존재라는 ‘전근대’의 유신론적 관념에서 (2) 인간은 돌연변이와 적자생존에 근거한 무계획적 진화의 결과인 DNA 주형의 산물이라는 ‘근대적’ 관념을 거쳐 (3) 인간이란 스스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구성된 비실제적 자아라는 ‘포스트모던’ 관념으로의 변천이 그것이다.


(윤리에 대한) 변화의 추세를 정리해 보자. (1) 초월적인 하나님의 성품 – 스스로 선하시고 그 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 에 근거한 ‘전근대’의 유신론적 윤리에서 (2) 보편적 인간 이성과 경험, 객관적인 선과 악을 분별하는 인간의 능력에 근거한 ‘근대적’ 윤리를 거쳐 (3) 도덕은 선과 악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복합적인 언어들이라는 ‘포스트모던’ 관념으로 변천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위에 기술한 특징들을 생각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제나 유동적이며 상대적이며 다원적이고 개방적임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일 뿐이다,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 또는 진리의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다는 등등의 많은 이야기를 우리는 오늘날 우리 주변으로부터 듣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리요타르의 주장을 눈여겨 볼만 하다. “설사 어제 받았다 해도, 이미 받은 것은 모두 … 의심해야 마땅하다. … 어떤 작품이 근대적이려면 먼저 포스트모던적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발생 단계에 속하며, 그 상태는 언제나 계속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주장은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파고들어 동성애자와 같은 성소수자들 역시 그저 다른 사람일 뿐이지 잘못된 사람이거나 ‘죄인’일 필요가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는 필연적으로 다양성 및 다원성을 낳게 된다. 그리고 아무런 절대적 가치판단의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다양성 및 다원성은 무조건적인 포용 또는 공동체 우선주의로 결과될 수 밖에 없다. 모두의 주장을 다 동등하게 인정해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나 또는 우리 공동체의 주장이 가장 우선시될 수 밖에는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푸코의 말처럼 언어가 즉 이야기 또는 담론이 권력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권력을 쥐게 된다. 이것은 더 이상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정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되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곧 권력이 되는 것이다.

세계관에 대한 다른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떤 면에서는 – 예를 들어, 우주에 대한 관점이나 진화에 대한 관점에서는 자연주의 세계관과 비슷하고, 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면에서는 무신론적 실존주의 세계관과 비슷하며, 또 인식론의 한 면에서 실재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의 극단으로 치우치거나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일 뿐이라는 극단으로 치우치면 결국 아무것도 참된 의미는 없다는 허무주의 세계관과도 비슷하기도 하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이 모든 세계관의 시대를 거쳤기 때문일 것이며, 다만 이렇게 자연주의나 실존주의의 전철을 밟고 있으나 거기에 언어적 색채를 가미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자연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 자체가 우연의 산물일 뿐인데 사후 세계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조차 없는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사이어가 제기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을 살펴 보자. 사이어는 포스트모더니즘 관점의 긍정적 역할을 먼저 열거하는데,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낙관적 자연주의를 정확하게 비판한다… 둘째, 언어가 권력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적도 정확한 통찰이다… 셋째, 우리의 인식 작용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에 주목하는 입장은 우리가 유한한 인간으로서 제한된 관점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들이다. 그러나 또한 그는 비판적인 입장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정적인 또는 모순적인 것들을 열거하였다. “첫째, 모든 거대담론에 대한 부정 그 자체도 하나의 거대담론이다… 둘째, 우리가 실재에 접근할 수 없다(사물의 진실을 지칭하는 의미에서 사실이라는 것이 없다)는 관념과 우리가 실재에 관한 이야기만 들려줄 수 있다는 관념은 서로 자가당착적 관계에 있다… 셋째, 언어의 불확정성을 주장하는 해체주의의 견해는… 해체주의자의 명제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넷째,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충족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충족성에 기초한다”는 것들이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체가 스스로 모순을 품고 있는 불완전한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과 전도의 방향

이제 기독교 세계관을 살펴보자. 이 세계관은 우리 크리스찬에게는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살펴도 충분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과는 너무도 다르게 기독교 세계관은 가장 먼저 절대적인 유일신을 인정하고 그 존재로부터 다른 모든 것이 비롯되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존재론이 인식론 보다 앞서는 것으로 가정하며 그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우주만물이 창조되어 존재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존재,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져서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하나님께서 정의하신 대로의 인간일 뿐이며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다양성을 가지고 사는 존재라고 주장하며, 모든 윤리와 가치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가장 기본적인 시작점으로 삼기 때문에 이 우주는 열린 우주라고 주장한다.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주와는 차원이 다른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 초월적 존재로 인하여 우주는 닫혀 있는 것이 아니고 열려 있는 것이 된다. 모든 존재가 우주를 벗어날 수 없고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우리도 닫힌 우주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고 초월자를 통해서 우주를 그리고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독교 세계관과 다른 모든 세계관과의 가장 크고 뚜렷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기독교 세계관을 아주 간단하게 살펴보기만 해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과는 너무도 상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유신론적 절대자를 의지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뚜렷하게 반대편에 서 있다.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는 처음부터 우연에 의해 생겨났고 모든 사물은 진화에 따른 우연의 결과일 뿐이며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절대적인 진리로 소개하고 선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소위 지성인일수록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반감이 심하여 창조주와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거부하기도 한다.

복음 전도에 있어서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사항이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거나 나의 생각으로 굴복시키려 해서는 안 되고 최선을 다해서 겸손하고 정성을 다해 대화하며 성령님께서 상대방의 영혼에 역사해 주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자세에서 우리가 복음 전도를 위해 불신자와 대화를 나눌 때에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는 생각을 먼저 불식시키고 뭔가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진리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다만 다원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무조건 다 악하고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입장을 누그려뜨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대화의 시작으로써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이해하는 상대주의의 모순점, 즉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관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주장은 과연 절대적인지 아니면 상대적인지 깊게 생각해 볼 기회를 먼저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처럼 확고한 그 주장이 절대적으로 올바른가 아니면 그것마저도 상대적인 것인가 하고 토론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주장은 명백하게 스스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이야기와 진리를 선포해도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 될 뿐이고 자기와는 상관없는, 자기는 다르게 생각하지만 옳은 것으로 그리고 그렇게 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내리게 될 뿐이다.

복음 선포를 위해서는 먼저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성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선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진리의 절대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즉 일반은총 아래서 모든 사람이 누리는 다양성은 복된 것이지만 특별은총 아래서 특별하게 계시된 진리의 절대성은 더욱 복된 것이라는 확인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다르게 다양하게 만드셨지만 또한 그 다양함 가운데서도 하나의 절대적 진리를 알 수 있도록 양심과 온 우주에 심어놓으신 창조주의 지문을 이해하게 해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창조냐 진화냐 하는 논의로 이어지므로 세상 사람들이 과학이라고 믿는 진화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성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의 인권운동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함께 그들을 크리스찬으로서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성경적인 판단을 가지고서 대화하여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이 문제를 마치 자기편과 아닌 편을 나누는 데 시금석처럼 사용하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하는데, 그들이 다원성과 다양성을 강조하고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데에는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주 앞에서 죄인이라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특별히 동성애자들에게 심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기독교 안에서도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동성애자 목사가 있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아예 동성애는 죄가 아니라는 주장까지도 서슴없이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다양성과 다원성을 포용해야 하는 경우에 동성애의 경우처럼 복음에 따르면 죄인 것도 죄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세상 사람들은 동성애는 죄가 아니고 원래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며 동성애는 정신병도 아니고 죄도 아니며 하나의 자연스러운 신체적 및 정신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경우에 동성애를 명백하게 죄로 규정하면서도 동성애자를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동성애가 죄이므로 동성애자도 죄인이며 따라서 그는 상종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도 따라서 가야 한다. 동성애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처럼 다양성과 다원성 및 절대적인 진리 사이에서 올바르게 자리잡지 아니하면 복음 전도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사람들에게 점차 더욱 널리 퍼지는 이유는 이러한 다양성과 다원성에 대한 주장이 마치 자기들의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덮어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니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 말고 서로 다르면 다른 대로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자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에서는 복음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의 할 일은 먼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능력 아래서 절대적 진리의 필요성과 상대주의의 허구성을 명확히 전달해야 한다. 복음을 듣는 사람이 상대주의적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절대적 진리가 어떻게 하나님 곧 창조주와 연결되는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진화론을 과학이라고 믿는 세상 사람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 수도 있지만 창조주를 믿고 의지하는 길만이 유일하게 참 평안을 누리는 길임을 선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다양성의 참된 의미가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가능한 것인지 설명하여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다양성을 철저하게 버리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 참 다양성의 의미를 알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그저 또 다른 진리일 뿐이고 그들은 그들 나름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복음을 거부할 것이다.


결론

우리는 크리스찬일지라도 시대를 벗어나서 살 수는 없다. 모두가 환경과 상황과 시대와 장소에 종속되어 살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우리 주님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할 의무가 있다. 아직 잃어버린 영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이 예수님께 돌아오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어떠한 가치판단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알아야 한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들은 현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관점은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다 상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어제까지 진리라고 인정받던 것도 오늘 다시 의심해야 마땅한 시대가 된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진화론적 사고를 통해서 인간의 절대적 정체성과 가치는 그저 우연에 의한 산물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우리 크리스찬들은 무엇보다 먼저 진리의 절대성을 올바르게 선포하고 또 증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냥 단순하게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하는 말은 더 이상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성경도 그저 하나의 담론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상대주의의 벽을 먼저 허물지 않고는 복음 전도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복음 전도자는 이 세상의 흐름을 명확하게 읽고 상대주의의 허점을 이용하여 먼저 상대주의적 사고방식을 허물어야 복음이 들어갈 여지가 생기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창조주의 창조와 진화론에 대해서도 세상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을 만큼의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 현 시대는 그저 내 말만 하고 그들의 말은 듣지 않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소통이 강조됨에 따라 일방적인 선포가 아닌 쌍방적인 대화와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고민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일방적인 선포의 때가 있고 대화와 고민 나눔의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선포만 한다면, 그들은 이제 일방적인 선포를 강압과 폭력으로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무조건적인 거부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 역시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은혜에 힘입어 겸손하면서도 확신있게 절대적인 진리를 선포함에 있어서 선한 다양성은 인정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들을 직시하면서 그들의 관점인 상대주의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며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그들을 데려가기 위해 지식과 지혜와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대화해야 하고 그 이후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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