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6~17)
전세계적으로 모든 지역교회들은 회중이 모여서 예배드리거나 성경 공부를 하거나 공동체적 활동을 하기에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모이더라도 소규모로 모여서 최소한의 거리를 지키며 떨어져 앉아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조심스럽고, 함께 식사를 하기에는 더욱 조심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공동체적 활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쩌면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가장 기초로 돌아가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것이 필요한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 시기를 오히려 영적 재충전의 시기로 삼아서, 우리의 믿음의 기초로 돌아가 내실을 다지고 팬데믹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래서 우선 먼저 복음이 무엇이며 우리 믿음의 기초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복음을 풀어서 쓰면 ‘기쁜 소식’이다. 그렇다면 왜 기쁜 소식일까. 무엇이 기쁜 것일까. 왜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일까. 이것부터 알아보자.
사람의 기본적인 상태 – 본질상 진노의 대상
사람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쳐 주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 중에 하나는, 아담의 타락 이후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죄 가운데서 태어나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며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시51:5; 롬3:9~20; 엡2:1~3).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받아서 사람으로 흠없이 창조되었으나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를 범하며 타락해버린 것이다. 이제 사람이 영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죽은 자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사람은 자신을 창조해 주신 창조주를 향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적이라 함은 지식과 이성이나 감성과 같은 사람의 자연적 능력에 대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은 자연적 상태에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온 정성 다해 경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하고 멀리 하며 하나님께 반항하는 상태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으며 심지어 자기가 그러한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의 결과가 아담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고 아담의 후손들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아담이 아담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로 이루어지는 모든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령한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부른다 – 아담은 계약을 위반하였고, 그 결과 아담의 영이 죽었으며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아담과 같이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 나라의 왕이 전쟁에서 패배하면 그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노예의 상태로 전락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유이다. 왕을 대표로 하여 그 나라의 모든 국민들은 왕 안에 묶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표자인 왕이 전쟁에 패배하면 그의 모든 국민들이 패배하는 것이 되는 역사적 상황과 동일한 것이다. 그 국민이 자기는 전쟁에 나가지도 않았고 왕과 무관하다고 주장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율법의 역할 –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음을 알게 함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선 먼저 사람이 자기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알도록 율법을 주셨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바로미터가 율법이기 때문이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율법이 없으면 도둑질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율법이다. 성경에 있는 모든 율법을 다 세세하게 정리하면 613 개의 조문이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며 더욱 요약하면 오직 2개의 계명으로 정리되는데, 즉 하나님을 온 맘 다해서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우리가 이 율법을 잘 안다고 하더라도 모든 율법을 항상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무지하며 반항적인 기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율법을 언제나 지킬 수가 없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양심에 따라 어느 정도 지킬 수는 있으나 모든 율법을 항상 완전히 지킬 수가 없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먹은 것을 죄라고 부르는 것처럼, 사람이 율법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부르는데, 모든 사람은 영이 죽었기에 죄를 범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이것을 알지 못했으나 율법이 주어지자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가르치기를, 의인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적인 혹은 도덕적인 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인 영적인 선, 즉 하나님을 온 맘 다해 경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모든 인격의 원형이시기에 하나님을 온 맘 다해 경배하며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을 무시하며 반항하는데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기만 한 사랑은 결코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가장 핵심인 하나님 사랑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하나님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으로서 모든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 완전히 합당하도록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에 맞는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므로, 창조물이 창조주와 영원히 분리되어 창조주의 은혜를 단 하나도 받지 못하고 아무런 희망 없이 철저히 부패한 영혼으로 끊임없이 고통받아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이러한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졌고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할 방법 –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가지 예외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 뿐이었다. 창조주는 창조물인 아담 밖에 계신 분이시므로 예외가 될 수 있었고 또한 예외를 만들어내실 수 있는 분이셨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외를 만드셔서 두번째 아담을 모든 사람을 위해 주셨다. 두번째 아담은 첫번째 아담과 동일한 사람이어야 하므로 사람의 아들이었고 또한 예외이어야 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첫번째 아담과 동일한 사람이었으나 그와는 다르게 타락하지 않았다. 끝까지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항상 완전히 지키셨고 완전한 의로움을 이루셨다. 첫번째 아담도 타락하지 않고 죄를 범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그는 타락을 선택했다. 반면에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께 신실했다. 그래서 사람이 첫번째 아담의 후손으로서 진노의 대상이었다면 이제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의 후손이 되면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이처럼 사람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서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아담이 첫번째 아담의 후손이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첫번째 아담과 동일한 사람이어야 다른 사람이 범한 죄의 책임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받아야 할 죄의 결과는 죄를 지은 사람이 직접 감당하거나 또는 다른 무죄한 사람이 대신해서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천사나 또는 어떤 동물이 사람을 대신해서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두번째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대신해서 감당하는 죄값을 무한대로 감당할 수 있어야 세상의 모든 죄값을 다 치를 수 있기 때문이었고, 또한 그의 의로움이 자신의 모든 후손들에게 나누어질 만큼 무한대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다.
십자가의 의미 –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명
이제 예수님은 아담을 비롯한 모든 사람의 죄값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죄인인 것처럼 취급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치러야 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친아들이자 유일한 아들인 예수님이 이처럼 비참한 상태를 겪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고 우리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시기에 아버지의 뜻을 기꺼이 이행하며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해 참으로 비참하게 죽음을 맛보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예외적인 길을 예수님이 몸소 직접 수행하신 것이다. 십자가 형벌을 받음으로써 율법이 정한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이제는 세상과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생겼다.
예수님이 열어놓은 방법, 즉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사람에게 적용되려면 이제 사람은 첫번째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후에 두번째 아담인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의 후손이 되어야 했다. 성경은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한다. 다만 사람이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거듭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낳아주셔야 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사람만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한 것이며, 예수님과 연합해야 했기에 예수님 안에서 태어나야 했고, 사람 스스로 낳아질 수 없기에 성령님이 낳아주셔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 예수님의 의에 대한 증명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의 형벌을 받으신 것이 그가 하신 전부였다면 사람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의 죄값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이 전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이상의 것을 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33년의 일생을 통해서 율법을 모두 다 온전히 지키시고 그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획득하셨다는 것이다. 그의 부활은 그의 의로움의 증명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후손들은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죄값에 대한 용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로움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후손들을 마치 예수님처럼 간주하셔서 그의 무죄함과 의로움에 따라서 그의 후손들도 무죄하며 의롭다고 보신다. 만약에 이렇게 전가받은 의로움이 없었다면 사람은 죄 용서 받은 이후에 자신의 삶에서 의로움을 쌓아서 하나님께 대해 합당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후손에게 전가됨으로써 그의 후손들은 스스로 의로움을 이룰 필요가 없어졌다. 그들은 예수님의 후손답게 사는 것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전가받았다는 것을 증거하면 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 새로운 삶에 대해서는 이 글을 보면 도움이 된다: https://comfortye.tistory.com/24?category=799636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각각 동떨어진 두 개의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한 사건의 두 가지 측면이다. 죽음은 한 사건의 시작이요 부활은 그 사건의 결말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렇게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만 의미를 둔다거나 또는 부활에만 의미를 두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언제나 그의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강조하고 동시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속죄의 적용 – 하나님의 예정과 사람의 믿음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살게 된 것을 하나님 차원에서 표현한 단어가 바로 ‘예정’이며, 사람 차원에서 표현한 단어가 ‘믿음’이다. 그래서 사람의 차원에서 사람에게 말할 때에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고, 하나님 차원에서 하신 일에 대해 말할 때에는 하나님이 예정하셨다고 말하는 것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속죄가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을 설명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예정을 가르쳐주는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에베소서 1장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정에 대해서 논할 때에 그 결론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면 이 논의는 뭔가 잘못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정은 하나님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 차원을 넘어서는 예정에 대해서 전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예정의 일부분에 대해서는 논리적 이해를 떠나서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 만일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예정을 전부 다 이해했다고 말한다면 그는 어쩌면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한 차원으로 올려놓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 알 수도 없고 전혀 이해할 수도 없으므로, 전도의 문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믿고 난 후에야 하나님의 예정을 표면적으로라도 알게 되고 그때에서야 하나님의 사랑에 따른 예정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좀 더 확장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차원에서 일어나서 사람 곧 창조세계의 차원까지 전파되는 것이며, 사람의 자유의지는 사람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서로 동등하게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치 시소처럼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면 사람의 자유의지는 무시되고 또 그 반대로 사람의 자유의지가 강조되면 하나님의 주권이 무시되는 것처럼 생각하면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무조건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셔서 모든 사람을 실제적으로 다 구원하시지 않고 심판하시는 이유에 대해 우선 두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하신 말씀인, 죄의 결과로서 영원한 죽음이 올 것이라는 말씀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만일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신다면 죄에 대한 의미가 없어져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 섬기는 것이 동일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죄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말씀은 반드시 지키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을 사랑하셔서 일부라도 선택하여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다만 어느 누구는 구원으로의 선택을 받고 어느 누구는 선택을 받지 못하게 되는 기준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달린 일이기 때문이며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택의 기준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한가지는, 그 기준이 우리의 어떠한 능력이나 혈통이나 자격이나 무엇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우쭐대거나 으시댈 수가 없다. 그저 엎드려 감사드리는 게 전부일 뿐이다. 그리고 행여라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도 우월감을 가질 수가 없다. 오히려 선택받지 못한 사람을 위로해야 한다. 혹시 나중에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어 그가 선택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삶
복음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기쁜 소식이며, 복음에 참여하는 것이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기에 기쁜 소식이며, 사람이 영원히 죽어야 하는 형벌을 벗어버리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기에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에 참여한 사람은 참으로 기쁘고 또 기뻐해야 한다. 이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새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 보자. 이 코로나 팬데믹의 상항 아래에서나 또는 팬데믹이 다 지나간 후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길이 무엇일는지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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