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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8.22 믿음, 소망, 사랑
posted by 풀숨 2020. 8. 22. 04:45

믿음, 소망, 사랑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모든 인격적 존재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가지 덕목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 왜냐하면 어느 존재가 인격적이려면 가지 덕목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지 덕목은 하늘과 땅을 사는 성도에게도 항상 필요한 덕목이기에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세상뿐만 아니라 주님의 재림 이후에도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믿음, 소망, 사랑이 무엇인지 막상 설명하려 하면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덕목에 대해서 조금 자세히 살펴보고 그리고 사랑이 제일인지 생각해 보자.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좋은 평판) 얻었느니라(11:1~2) 믿음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다. 믿음을 통해서 봐야만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며, 믿음은 그저 맹목적인 신념이나 이상주의자들의 신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무엇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진들이 믿음을 통해서 좋은 평판을 얻었기 때문이다. 선진들의 증거들에는 초자연적인 증거를 포함하기에 누구도 반박할 없는 좋은 증거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있게 되었다.

 

믿음(신앙) 신념의 차이는 인격적 관계의 유무에 있다. 성경적 믿음은 인격적 존재 사이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적 믿음은 반드시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을 요구하며, 믿음의 대상으로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믿음의 내용으로서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들과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필요로 한다. 믿음은 인격적 존재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믿음의 속성 역시 인격적일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비인격적인 것들은 결코 믿음에 포함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이 고백하기를, 죽을 4 완전히 겹치는 4444 4 4일에 지구가 완전히 소멸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하여도 그것을 믿음(신앙)이라 없다는 것이다. 그저 그의 신념일 뿐이다. 그의 신념에는 아무런 인격적인 관계가 없고 스스로 그렇게 믿는 것뿐이다. 또는 어느 크리스찬이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 아들이 무조건 명문대에 들어가도록 주실 것이라고 스스로 굳게 믿는다 하여도 그것을 믿음이라고 수는 없다. 그의 아들이 명문대에 들어가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지 그가 굳게 믿는다 해서 들어갈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그의 희망 섞인 신념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능력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

 

성경적 믿음은 인격적 존재 사이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며 쌍방간의 관계이기 때문에 사람 편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뿐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 대한 신뢰 역시 필요하다.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누가 자녀를 신뢰하겠는가. 다만 그의 자녀인 우리들은 너무도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이기에 우리 스스로 신뢰를 만들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우리 편에서의 신뢰까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아버지와 독립된 존재로서의 자녀가 아버지께 신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의 능력과 사랑에 힘입어 자녀가 신뢰를 쌓도록 아버지가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믿음은 이렇게 쌍방향이므로, 내가 잠시 믿음에서 실수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여전히 믿으시며 다시 믿음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다.

 

성경적 믿음에 있어서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과 하나님의 약속들이다. 맨처음에 창조주로서 우주를 창조하신 일부터 바로 오늘까지 역사하신 모든 것들과 하나님의 약속들이다. 모든 것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나와 관련하여 하신 모든 일이 나의 삶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공적 기록이며 나의 삶은 사적 기록이다. 그래서 나의 삶에 근거한 사적 기록은 공적 기록을 바탕으로 판단해야 올바르게 있다. 공적 기록 중에서도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생애, 죽음과 부활은 믿음의 내용 중에서 핵심이 된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덧붙여 우리는 공적 기록에 근거한 믿음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설명할 있는 우리의 사적 기록을 제시해야만 한다.  

 

이렇듯 성경적 믿음은 인격적 존재로부터의 증거를 바탕으로 한다. 아무런 증거도 증언도 없이 자기 혼자만의 상상으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 인격적 관계에서는 서로 간의 과거의 증거로부터  현재의 믿음이 조금씩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은 과거적 현재로서의 믿음이다.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근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시다. 따라서 시편에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표현과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소망은 근거가 없는 어떤 일방적인 바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것에 대해 기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약속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서 성취될 많은 약속들이 소망의 내용이며, 하나님이 소망의 성취자이시다. 소망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에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기대감을 갖고 담대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소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소망은 우리 영혼의 닻과 같아서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한다.

 

또한 넓은 의미에서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모든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을 살면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갖게 되는 소망이 있게 된다. 우리들 각자의 삶에서나 또는 교회 공동체의 활동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적으로 갖게 되는 소망도 소망이다. 다만 사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처럼 공적으로 주어진 소망과는 다르게 세상의 삶으로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소망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운데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현재의 기대로서 작용한다. 미래적 현재로서의 소망은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들에 기대어 현재의 삶의 방향을 맞추게 함으로써, 비록 현재를 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를 맛보며 현재를 살게 하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구별될 있다. 로마서에 기록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요한일서에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고린도전서에 정의된 것과 같이 이웃을 섬기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사랑은 뿌리에서 나왔으니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이웃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여기서도 이웃 사랑에 대해 살펴보자. 이웃 사랑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신 바로 사랑이다. 따라서 우리의 이웃 사랑은 예수님이 자신의 삶에서 몸소 보여주셨던 것처럼, 오래 참고 온유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서 오래 참는 것은 오랫동안 고통을 감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냥 적당히 무시하며 끝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며 넘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훨씬 적극적인 의미에서, 이웃으로 인해 받게 되는 고통을 오랜 기간 동안이라도 감내하며 자신보다는 오히려 이웃을 위해 실제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다. 나의 자아가 조금이라도 살아있으면 처음엔 뭔가 되는 같다가도 이내 원래의 나로 돌아와 버린다.

 

또한 내가 때에 이웃이 원하는 같은 것을 적당히 해결해 주는 것을 사랑이라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사랑이라 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고통이 뒤따르기에 사랑은 오랫동안 고통을 감내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은 나의 육체적 목숨을 내어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때에 따라 필요하다면 그래야겠지만 나의 자아를 죽이고 안의 그리스도가 역사하셔서 이웃을 위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셨던 것처럼 때로는 오히려 부딪쳐야 때도 있다. 그러나 부딪침이 나의 사적 만족을 위해서가 아님은 너무도 명백하다. 나의 자아를 죽이는 것부터가 얼마나 고통인지

 

그래서 사랑은 항상 현재적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항상 현재에서만 발현되기 때문이다. 내일 이웃을 사랑할 것이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제 이웃을 사랑했다는 것도 의미가 없다. 오늘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제 이웃을 사랑했다는 것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믿음, 사랑, 소망에 대해서 살펴보았으니 사랑이 제일인지 살펴보자. 이것은 먼저 간단한 비유로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나무를 비유로 들어보면, 믿음은 나무의 뿌리이고, 소망은 나무의 줄기이며, 사랑은 나무의 열매이다. 믿음이 단단히 받쳐주고 소망이 앞을 보며 성장하게 한다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맺는 열매이다. 열매를 이웃이 먹는 것이며 때로는 자신도 열매를 먹으며 즐거워 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소망이 생기며 소망이 있어야 오랜 고통을 감내할 있게 된다. 어느 사람이 믿음과 소망이 없는데 혼자 자기만의 신념으로 사랑의 행위를 한다고 해도 성경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람의 영혼의 부패성은 사람의 모든 행위를 오염시키기 때문에 먼저 부패성을 완전히 해결하지 않고서는 어떤 선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는 행위라 할지라도 부패성에 조금이라도 오염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주 조금이라도 오염된 것은 받지 않으신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에 의해 거듭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뿌리로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품고 자라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농축된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농부가 나무를 심는 것은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사랑이 제일인 것이다.

 

이것은 또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각각에 대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믿음은 과거적 현재요, 소망은 미래적 현재이며, 사랑은 현재적 현재임을 생각할 때에 자명해진다. 과거와 미래가 오히려 항상 현재로 소급되어 현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우리는 언제나 현재를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웃과 나누는 것은 언제나 현재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웃과 과거를 나눌 없고 미래를 나눌 없다. 오직 현재만을 나눌 있다.

 

또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말씀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11:1)라는 말씀에서도 있는 것처럼,  믿음은 소망으로 연결되고, 믿음과 소망은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이며 우리의 이웃은 우리로부터 나오는 사랑을 누리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믿음과 소망은 성경적인 믿음과 소망이 아니며, 성경적인 믿음과 소망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열매 맺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 세계를 이렇게 운영하신다. 그리스도가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1:3) 말씀과 같다.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만드시고 붙드실 뿐만 아니라 만물을 위해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영원히 항상 있을 것이며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소망을 누려야 한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명이 사망하는 현실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항상 있도록 하신다. 사랑은 세상을 뒤흔들 있는 사랑이다. 2000 전에 우리 주님과 제자들이 보여주셨으며 시대와 역사를 따라서 주님의 성도들이 보여준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도 힘을 내자. 우리 하나님은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비교할 없이 크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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