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 묵상하기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대언(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대언(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1:20~2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우리는 성경말씀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결코 온전히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며 성경은 계시된 말씀의 보존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때에 따라 어떤 특정 사건이나 사물을 통해서도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그러한 경우는 드물고, 또한 그렇게 계시된 하나님을 명확하게 이해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언어를 통한 계시가 가장 확실하다. 언어를 통한 계시는 명확할 뿐만 아니라 보존될 수 있으며 시대를 초월해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확인할 수 있고, 더욱이 사건이나 사물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를 판단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그러나 언어가 갖는 한계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왜곡되고 오해될 수 있기에 올바른 해석은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해석학은 아주 기초이면서 중요한 학문이다.
성경 해석의 기본은 역사적, 문자/문법/문학적, 그리고 신학적 해석이다. 이 말은 즉 성경 해석은 언어 자체의 문법과 문학, 언어의 시대적 용법 및 역사적 시대의 상황, 그리고 성경 전체의 문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번역의 문제까지 고려하면 더욱 복잡해진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대부분의 성경말씀은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초등교육을 마친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번역본에 따라서 좀 더 어렵게 번역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성경 해석은 성경말씀의 올바른 의미를 찾는 작업이다. 그래서 때로는 히브리어, 아람어나 고대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 등 언어에 대한 지식이나 성경 고고학이나 고문서학 등의 도움도 필요하며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반면에 성경적 묵상은 올바른 성경해석을 바탕으로 하여 성경말씀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 또는 하나님의 인격에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께 안기는 작업이다. 따라서 성경적 묵상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연합되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훈련을 포함해야 한다.
성경 해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교훈과 명령을 올바르게 이해했을지라도 이것이 결코 마지막 단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훈과 명령은 쉽게 교훈/명령을 내린 분과 분리될 수 있으며 교훈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교훈이나 명령으로만 받아들이면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가려지고 그저 사랑하는 행위 하나로 모든 것이 만족되는 것처럼 마무리될 수 있다. 십계명이나 주기도문 또는 시편 23편 등등의 성경말씀을 단편적으로 취해서 교훈으로 삼고 주문처럼 되뇌이며 그것을 행하기에 열심을 낼 수도 있다. 겉으로 보기엔 매우 신실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알맹이가 없다. 그는 십계명은 알아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적 묵상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명상과는 다르다. 단적인 차이는, 명상은 비움을 목적으로 하고 묵상은 채움을 목적으로 한다. 명상은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호흡을 따라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비워서 무념무상의 상태를 만들어 허무한 것에 마음을 뺏기지 않으려 하는 것인 반면에,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에 채워서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것이다. 개역개정의 시편에서는 묵상을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으로 자주 표현하였다 (49:3; 63:6; 71:24; 77:12; 119:15, 23, 48, 78, 97, 99, 148; 143:5; 145:5; ). 물론 개역개정에는 묵상이라는 단어도 나오는데 (시1:2; 19:14; 창24:63; 수1:8), 이 단어만으로는 그 의미를 알기 어렵지만 당시의 용례를 살펴서 이렇게 풀어서 번역했고, 묵상은 명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성경적 묵상은 거듭난 사람만이 할 수 있고 따라서 성령님과 이미 연합된 상태에서 시작되고 묵상의 모든 과정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기에, 묵상의 결과로 성령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묵상의 결과로 하나님과 더 친밀해졌다거나 성령님의 뜻을 좀 더 잘 깨닫거나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묵상의 목적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묵상이 아니라 명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왜냐하면 성경적 묵상은 그 시작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서 그 깊은 의미를 깨닫고 말씀으로 계시된 하나님께 더욱 다가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묵상의 과정에서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조명과 인도하심은 어떤 것일까.
첫째, 성경말씀의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뜻을 조명해 주신다 (지식과 지혜).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왜곡되고 오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문맥에 상관없이 한 구절만 딱 떼어내서 해석하려고 한다든지 또는 성경이 말씀하려는 의미보다는 나의 선호도에 따라서 주관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든지 하는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성경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은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므로, 우리가 묵상의 과정에서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다면 언제나 바르게 깨닫도록 하신다.
둘째, 성경말씀의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마음을 조명해 주신다 (사랑과 소망). 무엇을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교훈 그 자체가 아니라, 사건과 상황과 교훈과 명령과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조명하시고 인도해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말씀을 한 구절, 한 문맥 또는 한 장을 반복해서 읽으며 집중하면서 표면적인 문자 뒤에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가, 원하시는가, 화를 내시는가, 안타까워 하시는가, 실망하시는가, 칭찬하시는가, 기뻐하시는가, 슬퍼하시는가 등등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며, 무슨 마음을 내게 전달하고자 하시는가 집중해서 고민하며 살펴야 한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마음이신지 깨닫고 우리가 그 마음을 받아들이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신다. 이 모든 과정에는 성령님으로 인해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그 사랑에 닻을 내리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따라가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도 싫어하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도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하늘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라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단순히 문자적인 내용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편지를 보내실 때의 아버지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고 문장 하나하나에 스며있는 아버지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며 그 마음을 자녀가 알고 거기에 부응하는 것을 기뻐하시기에 편지를 보내신 것이다.
셋째, 성경말씀의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인격을 조명해 주신다 (법칙이 아니라 사랑과 공의). 하나님은 지금 우리 눈에 보이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마치 멀리 떨어져 계시며 법칙과 율법으로 우리를 주관하시는 분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마치 인과응보의 법칙이나, 또는 하늘 재판석에 앉아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검사나 심판자 정도로만 생각하고, 성경의 교훈대로 잘 행해서 하나라도 더 복을 받도록 노력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쉬운 예로는, 어느 성도가 병에 걸리거나 직장을 잃었을 때에 그가 뭔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무조건 반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또는 내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에 무조건 회개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감정과 의지와 생각과 지식과 지혜와 능력과 사랑과 공의와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며, 우리 인격의 원형이시며 온전히 완전한 인격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의 차원에서는 불변하시지만 우리의 차원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대하실 때에는 감정도 변하고 계획도 바뀌고 한탄하시며 후회하시기도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처럼 되셔서 우리의 인격을 대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의 차원으로만 밀어놓고 마치 우리의 차원에서는 역사하시지도 않고 인격적 존재도 아닌 분처럼 간주하며 하나님의 인격을 무시하고 법칙으로 치환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이시기에 우리와 대화를 하시는 것이다. 우리처럼 낮아지시며 우리를 인격적 존재로 대해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며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하시고 또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윤리와 도덕 교과서일 뿐.
넷째, 성경말씀의 단어와 문장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계획을 조명해 주신다 (주권과 섭리). 하나님은 온 세상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 각각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각 자녀의 성격과 체질과 성향에 따라서 다 다른 계획이다. 어떤 자녀는 목사로서의 삶을, 어떤 자녀는 청소부로서의 삶을, 어떤 자녀는 의사로서의 삶을, 어떤 자녀는 엔지니어로서의 삶을, 이렇게 다양한 위치에서 다양한 삶을 살지만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삶을 살게 하신다. 날짜나 시간표로 정리된 계획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길에 대한 계획을 가르쳐 주신다. 이 계획은 숨겨져 있다가 어느날 불현듯 나타나기도 해서, 어떤 자녀가 갑자기 선교 여행을 떠나겠다고 할 수도 있고, 또는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반대로 목사의 삶 대신에 청소부의 삶으로 변경했으나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서 발현되도록 인도하시며 능력을 주신다 (역사하심).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올바르게 이해하고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에서 발현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자기 형제조차 사랑하지 않으면 그 교제는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자기가 위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성령님은 내가 하나님을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능력을 주신다.
이상과 같이 성경적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묵상을 하면서 깨달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을 완전하고 역사하시는 인격적 존재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잘 하면 복 받고 잘못 하면 벌 받는 법칙 정도로만 생각하거나, 혹는 말로만 또는 피상적으로만 하나님이란 존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완전한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육신적 아버지에 대해 가슴 아픈 기억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하기가 무척 어려울 수도 있지만 어떤 대안을 찾아서라도 하나님을 완전하신 인격체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시편 91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전염병에서 건지시며 수많은 사람이 곁에서 쓰러져도 이 재앙이 결코 성도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시리라고 노래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보면 많은 크리스찬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사망하였다. 그래서 이 시편에 대해 이해하기를, 성경 말씀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완전히 모든 성도들을 지켜주신다는 의미는 아니다고 하거나 혹은 하나님은 대부분의 성도들은 지켜주시는데 일부는 어떤 심각한 죄를 범했거나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라는 정도로 생각한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욥기를 살펴 보면, 욥은 온전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1:1, 1:8; 2:3)고 거듭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심한 고통과 고난을 당한다. 그래서 어떤 성도들은 욥기를 읽으려 하지 않는다. 두려움 때문이다. 신실한 사람도 이렇게 심한 고난을 당할 수 있으니 나 같은 사람은 얼마든지 고통을 당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면서 욥기 중간에 있는 문장만 떼어내서 주문처럼 외우고 다니기도 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누가 무슨 의도로 왜 이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 의미가 좋으니 암송할 만한 구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하나님은 일종의 무조건적 법칙, 즉 중력의 법칙이나 에너지 보존 법칙처럼 무조건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하는 인과응보율을 집행하는 심판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들을 어떠한 전염병에서도 다 지켜주시는 분이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녀의 필요에 따라서 자녀를 위해서 자녀에게 전염병을 허락하시기도 하는 분이시다. 하나님 안에서는 전염병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과 인격을 알고 있다면 어느 쪽이든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된다. 더욱이 욥의 경우처럼 온전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셔서 그의 영적 성장을 도와주신다. 그래서 욥은 나중에 하나님 옆에 서게 되는 영광을 누리며 하나님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과 훨씬 더 친밀해졌다. 욥기를 읽으면서 이처럼 자녀의 성장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여 어떠한 고난조차도 기쁨이 되며 궁극적으로 이겨내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더욱 활기차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 묵상의 과정과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묵상할 것인가. 성경적 묵상은 어떤 하나의 루틴이 아니다. 매일 동일하게 반복해야만 하는 어떤 판에 박힌 과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성령님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가지 고려해야 할 것들은 있다.
첫째, 묵상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정리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내 생각이나 내 경험, 자랑, 지식을 먼저 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읽고 반복해서 읽으면서 오직 말씀만이 내 마음에 가득차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하게 해야 한다.
넷째,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마음과 인격과 계획을 찾고 구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내 안에 품어야 한다. (오늘 성경본문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는가)
다섯째, 하나님의 마음이 내 삶에서 드러나고 하나님의 인격이 나의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묵상을 꾸준히 – 비록 매일은 아닐지라도 – 계속해야 한다.
이러한 단계들은 묵상의 수준별로 나누어지는 것들이 아니고, 첫째부터 마지막까지 모두 다 해야 묵상을 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한 단계씩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나의 경우로 보면, 아마도 다섯째 단계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서 이루었을 때의 기쁨은 그 무엇보다도 크며 더욱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의 올바른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내 삶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서 떠나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은 내게서 멀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 말은 제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내 안에 품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넷째 단계가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내 삶에서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동일하다 (ㅠ 반성하는 중… ㅠ)
시편 23편이나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지금까지는 암송하는 것이 전부였다면 이제부터는 묵상을 해보자. 내 편에서 내게 좋은 의미만을 발견하려고 애를 썼던 방식을 버리고, 시편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보고 하나님의 인격을 발견해 보자. 그리고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늘 아버지이심을 기뻐하며, 그 아버지께 안겨서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누려보자. 성경말씀을 묵상하는 기쁨과 재미를 알게 될 것이며, 나날이 성장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묵상을 하자.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니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말고 묵묵히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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