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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풀숨 2020. 10. 3. 00:34

이교에 물든 기독교”를 읽고


처음 2002년도에 원제 “Pagan Christianity?: Exploring the Roots of Our Church Practices”라는 책으로 프랭크 바이올라와 조지 바나가 공동 저술한 “이교에 물든 기독교”는 크리스찬으로서 우리의 예배와 신앙 생활을 되돌아 보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된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한국에서도 거의 10년 전에 번역본이 출판된 책이며 교회의 관습들을 통해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저자들이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그동안 ‘그냥 그렇게 해 왔으니까’ 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해 왔던, 교회 내의 여러가지 전통 및 관습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가 건물을 가리키는가 아닌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심지어는 정장을 입고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까지도 바이올라는 언급하고 있다. 교회가 건물을 가리키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언급해 왔기에 어느 정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성가대나 정장에 대해서는 다소 생소한 것들도 접하게 되었다. 또한 세례/침례에 대해서도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였다.


책의 구성

이 책은 제 1장에서 우리가 진정 성경대로 해왔는가 하고 질문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각각 차례대로, 교회 건물, 예배 순서, 설교, 목사, 주일 예배 의상, 음악 사역자들, 십일조와 성직자 사례비, 세례와 주의 만찬, 그리고 기독교 교육 등에 대해서 하나씩 그 기원과 유래를 추적해 보고 또 성경에 기록된 초대 교회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서 과연 현대의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 후에 마지막 2개의 장들에서 다시 성경으로돌아가기를 권면하며 마친다.


목사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프랭크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예배와 목사에 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면 프랭크는 교회 내에서 목사라는 직분자로 인해서 교회 자체가 제도화 되고, 성도들이 차등화 또는 계급화 되고, 또 성도들이 교회 내에서 담당해야 할 사역의 기회를 빼앗김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올바른 예배가 무너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교회 내에 소위 말하는 ‘전문가’의 등장은 아주 소수의 전문가와 수많은 비전문가들을 구분하여 정의하게 하였고 또한 비전문가들을 분리시켜서 전문가 아래에 두는 제도로 이어졌던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사실이다. 그래서 섬겨야 할 직분이 군림하는 직분으로 바뀌게 되었고, 사랑의 섬김은 입술에서만 존재하게 되는, 즉 소수의 전문가들이 실제적으로는 소위 ‘평신도’ 그룹의 수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모양이 되었다는 것 역시 역사적으로 사실이다. 이로 인해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프랭크의 진단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프랭크는 책의 앞부분에 자기가 가장 중요하고 생각하는 바로 이 두 가지의 이슈, 즉 교회와 목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교회란 무엇인가와 목사란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해서.


현대 교회들에서 목사는 절대적인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 지역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담임목사 한 사람에게 신앙 생활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만 생각해 봐도 목사는 지역교회 내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다. 마치 목사가 없으면 교회가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세태를 봐도 그렇다. 특별히 한국교회 또는 미국의 한인교회들은 카리스마적인 목사가 좋은 목사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며, 모든 성도들이 너무도 과도하게 (담임)목사에게 의존하다 보니 목사가 마치 하나님의 (직접적인) 대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다면 목사는 성경적인 직임인가? 물론 그렇다. 프랭크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프랭크가 지적하듯이 목사라는 직임은 다른 모든 직임 및 은사와 평등한 직임이지 그 위로 높여져서 목사가 직분이 된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프랭크는 교회 내의 직임 또는 기능(function)과 직분(office)을 구분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목사는 기능이지 직분이 아니다. 기능이라 함은 어떤 사역에 대한 설명인 것이지 어떤 사람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감독과 집사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기에 직분이다. 그러나 목사는 기능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라고 이해한다. 에베소서 4장에 기록된 “목사와 교사”라는 단어 역시 비록 사람에 대한 명칭이긴 하지만 기능을 설명하기 위한 명칭이지 사람에 대한 설명은 아니라고 본다. 디모데서나 디도서에 기록된 감독/장로와 집사에 대한 설명은 사람의 자질과 자격에 대한 설명이므로 사람 자체에 대한 것이나, 에베소서에 기록된 목사라는 단어는 사람의 자질과 자격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어느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기능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로버트 뱅크스와 달리 프랭크 바이올라는 디모데서나 디도서에 기록된 감독/장로와 집사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로버트는 “바울의 공동체 사상”의 부록에서 간단하게나마 감독과 집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프랭크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프랭크의 다른 책인 <다시 그려보는 교회>에서는 감독과 집사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 그는 감독과 집사 역시 기능에 대해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것이지 계급이나 직급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못박고 있다. 그리고 감독과 집사의 자격과 자질에 대한 설명 역시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과 자질인 것이지 그런 자격과 자질이 있다고 해서 다른 성도들 보다 더 높은 계급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프랭크와 약간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데 감독과 집사 역시 섬기는 기능이 우선이라는 데에는 같은 견해이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감독과 집사의 자격과 자질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그 기능 못지않게 그 기능을 수행할 사람의 성품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더 영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성도들 보다 더 높은 계급의 신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영적이기에 더욱 더 섬기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교에 대해서

목사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프랭크는 설교에 대해서 먼저 논하고 있는데, 현대 교회에서 목사의 가장 핵심적인 임무가 설교이고 또 설교라는 제도로 인한 문제점들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 보다도 심지어 수십년간 설교를 들었던 사람인데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고 여전히 젖먹이 정도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 이러한 문제점들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혹은 설교의 기원과 문제점들은 목사라는 특수 전문가를 생산해 냈고 또 목사는 설교라는 특수 임무를 등에 없고 특별한 지위를 누려왔는지도 모르겠다.


현대 교회에서 목사라는 직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목사는 나머지 모든 성도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목사가 성도들과 삶을 나눌 수 없고 또 서로의 삶에 대해 동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설교’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목사가 아무리 성경적인 설교를 할지라도 목사의 삶의 관점에서 바라본 설교이기에 성도들의 삶에 전혀 침투할 수도 없고 진정한 영향을 미칠 수도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은 청중들의 삶에 직결되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였으나, 현대 시대에 교회라는 제도 아래에 있는 목사는 얼마만큼 교회의 성도들과 삶을 나누고 있을까?


설교가 그리스-로마의 문화가 아니라 유대인의 회당에서부터 유래했다는 많은 신학자들의 견해에 대해서 프랭크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회당에서 정기적으로 구약성경을 읽고 그 읽은 성경말씀을 강론했다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라, 회당에서도 정해진 한 사람만 강론했던 것이 아니었고 또 강론 중에 얼마든지 청중은 질문하고 서로 대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프랭크는 설교의 기원을 그리스-로마의 연설/웅변 문화에서 찾는다. 프랭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기에 현대의 설교는 회당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프랭크의 진단

결국 프랭크에게 있어서, 현대의 비뚤어진 교회관과 잘못된 목사관으로 인해서 교회다운 교회가 되지 못하고 아주 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성도들이 다 수동적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역할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소수의 전문가와 다수의 수동적 회중의 관계가 정해진 이후에는 교회의 모든 것이 다 그 방향을 따라가게 된 듯 보인다. 세례/침례와 주의 만찬 역시 소수의 전문가가 집전하는 아주 특별한 의식이 되었고 성도는 수동적으로 참여하든지 아니면 거의 완전히 배제되어 구경꾼의 신세로 전락되었다.


교회, 예배, 설교, 그리고 목사에 대한 프랭크의 견해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 보다도 중요한 것은 과연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와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일 것이다. 프랭크의 견해가 대체로 성경적으로 올바르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현대의 교회, 즉 제도적 교회를 다시 초대 교회와 같이 유기적 교회로 회복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만 한다. 비록 그 방법이 프랭크가 추구하고 시도하고 있는 방법과는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는 뭔가를 해야만 한다. 현대 교회가 성경적이지 않은 면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성도로서 뭔가를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 의식 가운데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또한 신학교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러한 사실에 실망하거나 좌절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소망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성경적인 삶이 줄 수 있을 것 같은 미래,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기쁨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 생활 전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심지어 기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성경말씀으로 돌아가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게 된 기회는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몰랐다면 그냥 그렇게 넘어갔을 것을 이제라도 알게 되었고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또한 이전부터 신앙생활을 하면서 막연하게나마 ‘이건 아닌데…’ 했던 것들에 대해서 살펴보게 되어 큰 유익이 되었다.


또한 흥미롭게도 프랭크는 신학교나 성경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지식 전달이 목적이자 목표가 아니라 진정 기독교 신앙을 전달하는 신학교의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일방적인 지식의 전달이나 주입식 교육이 아닌 것들의 필요성이 신학교에서야말로 더욱 중요한 요소이므로, 소통과 질의 및 응답 형식의 수련회나 여름 캠프와 같이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며칠이나마 함께 생활하며 토론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한 강의 시간에서도 질문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결론

결론적으로 프랭크 바이올라의 “이교에 물든 기독교”는 성경에 기록된 초대 교회의 모습을 추적하고 파악함으로써, 비록 이제는 엄청나게 변해버린 삶의 방식으로 사는 현대의 성도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렇기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한번 이 책을 읽어볼 것을 추천드린다. 그냥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물론 프랭크가 제기한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지금 당장은 없다. 프랭크 역시 그 해결책을 다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우리 모두를 가르치시는 성령님이 계시므로 소망을 갖고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고민하고 올바르게 나아가려는 노력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반드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각 지역 교회의 특성에 맞게 하나님이 기뻐하실 교회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예배를 드리는 그 날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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