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위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

풀숨 2021. 3. 27. 22:51

삶으로 드리는 예배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아마도 우리 크리스찬의 가장 큰 고민이자 평생 동안 이어질 고민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일 것이다. 마치 어린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하면서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고민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고민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고민을 영원토록 할 것이다. 이 고민은 우리가 개인적인 삶을 살 때나 공동체적인 삶을 살 때를 막론하고 평생 동안 이어지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이어질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 동일한 고민을 했고 로마서 12장 이후에 여러가지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그 첫번째가, “무명으로 사는 삶”이란 글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이 세상을 따르지 말고 주님을 따라서, 세상에서는 무명으로 살지만 주님 안에서는 능력 있게 사는 삶이다. 사도는 이 가르침을 통하여,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직하고 순수하며 단순하고 열심이 있고 성실하며 겸손한 삶을, 그리고는 계속해서 용납하는 삶과 분별하는 삶을 가르쳐주고 있다. 은사, 지혜, 사랑과 화목에 대한 말씀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구체적인 적용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그 말씀들은 분별과 용납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도가 은사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각 사람이 각각의 은사를 받아서 외적으로 능력 있게 살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다. 성령님 안에는 다양한 은사들이 있으며, 따라서 공동체 안에 다양한 은사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럼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가 한 몸으로서 통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이 의미를 다른 말로 설명하면 서로가 서로를 다르더라도 용납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도 기록된 것처럼 요점은 은사들의 종류에 대한 설명이라기 보다는, 바로 이 말씀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는 말씀에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된 사랑, 즉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며 인내하고 품어주는 사랑이다. 공동체에 필요한 은사가 개인이 선망하는 은사와 다를 수 있으며, 각 개인의 은사의 종류가 같더라도 그 깊이와 크기가 다를 수 있고, 사역에 따라서 필요한 은사도 다르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모든 은사는 다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르더라도 그리고 다르기에 서로를 용납하고 주님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서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우리는 진정 알고 있을까. 지식과 말로는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정작 우리의 삶에서 이루려고 하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매순간마다 절감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성상 자기와 다르면 싫어하기 때문이고, 또 다르면 누가 더 나은가를 따지며, 결국 높은 자와 낮은 자 사이의 차별을 만들기 때문이다. 다르기에 서로 합하여 더 나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보다는 서로 누가 더 우위에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게 사람의 본성인 것 같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크리스찬일지라도 서로를 용납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이유는 우리는 우리의 깨달음을 우리의 육체로 실현시킬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우리의 본성이 그렇고 우리의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깨달은 대로 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본성을 쳐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섬김이다.

 

또한 분별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옳으므로 내 편이고 틀리므로 내 편이 아니고 잘라내야 하고 심판해야 할 대상으로 구분짓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분별은 진리를 바탕으로 하여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을 깨닫고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옆에 지혜롭게 함께 서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웃과 함께 서 있기 위하여 나의 부족한 부분을 깨닫고 그 부분을 채워서 서로 화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것 역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분별에 대해서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향으로만 간다. 즉, 대상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고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것으로 나누며 함께 할 사람과 잘라내야 할 사람으로 나누어 그냥 버리는 방향으로 간다. 다른 것을 품어서 진주를 만들어 내는 고통을 감당하는 것보다 그냥 버리는 것에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상대를 버리고 나는 남음으로써 생존에 의해 정당성이 증명된 것처럼 합리화한다. 분별을 잘못 사용하면 차별이 된다.

 

모든 종류의 차별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으며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왕따든 직장에서의 차별이든 심지어 인종차별이든 모든 종류의 차별은 이웃을 인정하지 않고 나와 다르기에 싫다는 것이며, 싫기에 차별하게 되는 것이며, 차별하기에 버리는 것이 된다. 특별히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미국 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코로나 사태가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인식과 함께, 이 펜데믹의 고통을 해소할 대상을 아시아인으로 삼게 되면서 인종차별이 더 심해졌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차별을 반대하며 특별히 인종차별은 더욱 더 반대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구별은 섬기고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차별은 미워하고 버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웃을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하는 것과 같다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 너무도 가볍게 들리는 시대가 된 것은 세상이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르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분별하여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는 삶이 예배드리는 삶이다.

 

또한 이렇게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적극적이어야 한다. 개인적인 삶에서든 공동체적인 삶에서든 적극적으로 용납하고 적극적으로 분별하며 적극적으로 겸손하고 적극적으로 낮아져야 한다. 도피적이고 소극적으로 자신을 제한하고 상황과 사건으로부터 도망가서 혼자 동굴에 들어가 있는 상태로는 기쁨이 가득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도망가면 어디에 있든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실력이 부족하고 능력이 모자라며 작은 아이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처럼 헤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통해 적극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여기저기 나대고 이곳저곳 헤집고 다닌다는 말과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의 육신이 우리를 부족함에 머물게 하고 우리의 상황이 우리를 무능력으로 내몰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이겼고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있게 사는 사람들이다. 비록 목표점은 멀지라도 매일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며, 바로 그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