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위로

위선의 늪

풀숨 2021. 7. 17. 05:52

위선의 늪

 

우리 주님이 공생애의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 주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책망을 받았던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 (마 23:13, 15, 23, 25, 27, 29). 그들은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종교적인 권위를 가진 지도층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가장 많은 책망을 들었으며 책망의 내용도 아주 신랄한 것뿐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그들은 위선자요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책망이었다. 하얀 페인트로 무덤의 겉을 칠해 놓아서 겉은 그럴싸 한데 속은 죽은 뼈들 밖에는 없다는 의미이다. 개역개정본에는 ‘외식’이라는 단어로 위선을 표현하고 있기에 그 의미를 어렵게 해서 가려놓고 있지만 영역본의 경우에는 hypocrite(위선자)라는 단어로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위선자의 대표적인 행동은 자기를 잘 포장하고 또 남을 쉽게 비난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행위나 삶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대체로 눈 감고 넘어가지만, 다른 사람의 아주 조그만 잘못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고 비난하고 정죄함으로써 마치 자기는 그러한 잘못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라고 포장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우리 주님이 아예 대놓고 책망하시기를,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눅 6:42)고 하셨다. 또한 위선자는 남들이 볼 때에는 거룩한 척하지만 아무도 없거나 누구도 볼 수 없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아무런 꺼리낌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위선자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며, 조그만 이익인데도 그것을 위해서 그 어느 것도 손바닥 뒤집듯이 버리기도 하고 취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찾아다니며 그것을 통해 자기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포장과 함께 위안을 누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교회 내에서도, 예를 들어, 설교 말씀을 듣거나 어떤 충고를 들었을 때에 그 말씀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먼저 적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그를 정죄한다. 흔하게는 아마도 이런 식일 것이다. 설교 시간에 어떤 말씀을 듣다가 ‘아 이 말씀은 박장로가 들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거나 또는 주위를 둘러보며 ‘아 오늘 김집사가 안 왔네. 이 설교를 들어보고 좀 깨달으면 좋겠는데…” 같은 생각을 했다면 그것이 바로 위선의 시작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위선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자체가 이미 위선에 빠져버렸다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모든 설교 말씀은 우선 그 말씀을 듣는 자신에게 먼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위선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히 눈을 감고서는 밖으로만 눈을 뜨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찾아다니는 것이야말로 위선의 시작이다. 이 지점을 지나면, 이제 실제로 남의 허물을 비난하고 정죄함으로써 남을 무너뜨리고 자기 자신은 거룩하다는 평판을 얻어 만족을 누리며, 더 큰 허물을 가진 다른 사람을 찾아다닌다. 교회가 분란과 분열과 파당 싸움으로 가득하게 되는 지름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런 자들을 참으로 강하게 책망하셨다. 위선자요 회칠한 무덤이요 독사의 새끼라고 하셨다.

 

우리는 어떤가? 자연적 상태에 있는 사람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다를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심지어 거듭난 사람도 여전히 육신의 죄성으로 인해서 누구나 위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의 눈은 항상 밖을 향해 열려 있어서 다른 사람을 먼저 보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님으로 인해서 자신을 알기에 위선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거나 설교 말씀을 듣거나 기도하는 동안에 성령님이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며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므로 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은 성령님의 이러한 인도하심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 수가 없고 따라서 위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물론 윤리적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통해서 심각한 위선에 빠지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스스로 보는 것에 한계가 있으며 또는 편견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며 그리고 또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완전히 진리이시므로 우리의 모든 잘못을 정확하게 교정해주실 수 있다. 비록 우리의 역량과 실력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따라갈 수는 없을지라도 성령님의 인도하심 자체는 완전하기에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전심으로 따르고자 한다면 위선을 이겨낼 수 있다.

 

디모데후서 4장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뒷부분을 NIV에서 번역하자면 “그러한 가르침들은 위선적 거짓말쟁이들을 통해서 오며 그들의 양심은 뜨거운 인두로 지져 말라비틀어져 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그들은 이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자기의 양심을 되살릴 수 없게 되었고 사탄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미혹하며 거짓을 퍼뜨리지만 스스로는 결코 잘못됨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위선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겉으로는 진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겉으로도 거짓으로 보인다면 누구나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지만, 그것이 비록 속으로는 술수와 사기와 거짓일지라도 겉으로는 진리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속아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에 대해서 평가하신 말씀이 바로 그들의 말은 따를지라도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말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 같지만 실제 행위는 거짓과 폭력과 억압과 착취와 사기였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정도의 위선자를 찾기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뉴스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의 말로는 ‘선택적 정의’라고도 할 수 있고 또는 ‘내로남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에게는 항상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먼지 하나라도 털어대면서 정작 자기 자신이나 자기 친구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잣대로 그냥 넘어가는 사람들이 뉴스에 나온다. 지역 교회 안에서도 그렇다. 특히 지역 교회에는 위선자들이 많이 있을 수 있는 구조를 가졌다. 지역 교회에 출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선자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상당수가 위선자일 가능성은 있다. 이것은 진리가 교회 안에서 선포되고 있어서 귀로는 진리를 들을 수 있으나 삶으로는 진리를 무시할 기회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습관이 될 정도로 방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 교회들은 성령님과 함께 리더들이 그러한 사람들의 삶도 진리로 이끌어야 하는데 리더들조차도 위선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있고 또 리더들의 수가 제한적이어서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까지 돌볼 수 있는 여력이 없기에 그러한 사람들은 사각지대에 놓이고 자기들만의 기준을 스스로 정해서 교정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는 구조로 쉽게 빠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교회에 모이는 회중의 크기가 리더들의 수에 맞게 적절해야 하는데 요즘은 무조건 큰 교회를 추구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다. 목사나 장로들은 교회가 크면 마치 자기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우쭐대고 그러한 교회의 교인들은 마치 자기는 대단한 집단에 소속된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목에 힘을 준다. 위선에 빠진 전형적인 형태인데도 교회 전체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또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하지만 그 말이 정작 상식적이지도 않은 주장이라는 것을 자신들만 알지 못한다. 그러니 교회 밖의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말하기를, ‘저런 하나님을 누가 믿겠느냐’ 하면서 오히려 교회를 조롱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는데도 그 안에 갇혀 있어서 오히려 적반하장식으로 더욱 어리석은 주장을 하게 되고 교회를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거나 설교 말씀을 듣거나 기도를 하거나 찬송을 부르거나 어느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거든 항상 그 말씀을 나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눈이 나 자신이 아니라 남을 먼저 향할 때에는 반드시 위선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어떻게 하든지 나 자신을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고 무조건 적용해야 한다. 위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이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었을 때에 ‘아 좋은 말씀이네. 은혜 받았네’ 하고 그냥 습관적으로 넘어가면 그것은 이미 위선의 징후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 말씀은 박장로가 들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한다면 위선이 시작된 것이며, 만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을 정죄하고 비난한다면 위선에 빠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은혜 받았다면 그 말씀이 먼저 나 자신에게 적용되어 내 삶을 변화시키고 열매 맺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래야 위선의 늪에 빠지지 않고,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